절에 가면 커다란 종을 볼 수 있는데 그 종을 범종이라고 한다. 범종은 중생을 일깨운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절에서 시간을 알려 주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혹은 불교 의식을 할 때 울리도록 되어 있다.
범종 소리를 들으면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까지도 제도하여 극락으로 보낼 수 있다고 하니 절에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다.
우리나라에서 범종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전해졌던 삼국 시대부터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종은 8세기 통일 신라 때부터 만들어진 종들뿐이다. 당시에 커다란 범종을 만들었던 것은, 왕을 비롯한 지배 계층의 생전 업적을 기리거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 대표적인 범종이 바로 성덕대왕 신종이다.
범종에는 10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통일 신라 제35대 경덕왕은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구리 12만 근을 쏟아 부어 범종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종을 완성해 놓고 시험 타종을 하면 번번이 금이 가고, 범종 특유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범종 제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경덕왕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경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혜공왕은,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범종을 자신이 꼭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조정 대신인 김옹과 김양상을 불러 신신당부를 했다.
“성덕대왕 신종을 반드시 완성하도록 하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김옹과 김양상은 장인들에게 종을 정성스레 잘 만들라고 부탁했다. 이에 장인들은 종틀을 만들었고, 구리물을 붓는 작업만 남겨 두게 되었다. 하지만 김옹과 김양상은 망설이고 있었다. 구리물을 부어 종을 완성하면, 그 종이 지난번처럼 또 금이 가거나 깨질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은 이런 소문을 들었다.
“종이 금이 가거나 깨지지 않으려면 마음이 깨끗한 어린아이를 구리물 속에 넣어야 해.”
그래서 김옹과 김양상은 범종을 설치할 봉덕사 스님들과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그 자리에서 한 스님이 말했다.
“제가 어느 마을로 시주를 얻으러 갔을 때, 어린 딸을 시주로 바치겠다는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얻어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 그게 정말입니까? 어린아이를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니, 부처님의 뜻이 틀림없어요.”
스님과 두 사람은 여자아이를 데려와 장인들에게 넘겼다. 장인들은 아이를 끓는 구리물 속에 넣어 종을 완성한 뒤 시험 타종을 했다. 그런데 종은 금이 가거나 깨지지 않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듯 “에밀레, 에밀레!” 하는 슬픈 소리는 100리 밖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때부터 이 종은 ‘에밀레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771년(혜공왕 7년) 12월 혜공왕이 종소리를 듣고 “지상에서는 듣기 어려운 맑은 하늘의 소리이니 ‘신종’이라고 하라.”고 명하여 ‘성덕대왕 신종’이 되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봉덕사에 걸려 있다가 조선 시대 초에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 1460년(세조 6년) 영묘사로 옮겨졌고, 중종 때에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지어 보관되어 왔다.
그 뒤 1915년 8월 경주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1973년 새로 지은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전시하고 있다.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 신종은 높이 3.75m, 둘레 2.27m, 두께 11~25cm이고, 무게가 약 21t이나 되어 우리나라 최대의 범종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몸체 표면에 꽃구름을 타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향로를 받들고 내려오는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예술품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이 범종은 긴 여운을 남기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종소리로 유명하다. 언젠가 일본의 어느 방송국에서 세계 각국의 이름난 종소리들을 녹음해 경연대회를 가졌는데, 성덕대왕 신종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우리나라의 오래된 범종들이 일본에 많이 건너가 있다면서요?”
일본에는 지금 50점이 넘는 한국 종들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는 통일 신라 범종이 네 점이나 있고,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범종도 여러 점 있어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이런 귀중한 종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왜구들의 피해가 심했던 13~14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중요한 문화재인 범종을 마구 약탈해 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며, 절에 있는 종을 강제로 빼앗아 일제 병기창으로 가져갔다. 그 중에는 강화도 전등사의 범종이 포함되어 있다. 1468년(세조 14년)에 만들어진 종로의 보신각종도 병기창으로 실려 갈 뻔하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보신각종은 조선 총독부가 1934년 8월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여서 손댈 수 없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