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H체험을 말하는 50대들 - 이동희 / 소설가
"농촌의 겨울은 휴면 기간이다
지혜 있는 농민들은 이런 때에
농사지식을 축적한다"
싸락눈이 오고 있다.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고 모진 겨울 바람이 몰아친다. 아직 그렇게 많은 눈은 오지 않았지만 곧 폭설이 쏟아져 골목길도 다 차단하고 말 것이다. 언제나 겨울은 그랬다.
농촌의 겨울은 휴면 기간이다. 동식물이 동면을 하듯이 사람들도 휴식을 취하며 논다. 억지로 편하다고 할까. 연일 된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저녁 5시면 마을회관에 다 모여-주로 노년 중년들이지만-밥을 같이 먹는다. 콩나물밥을 해서 양념장에 비벼 먹기도 하고 무국이나 김치찌개를 하여 말아 먹기도 하고. 된장, 김치, 고추 말린 것을 볶아놓은 것, 고추 잎 묻힌 것, 동치미 등은 기본으로 상에 놓인다. 집집마다 조금씩 가져온 것이다. 쌀은 군에서 지원을 하고 김치는 황간농협 매곡지소에서 담아다 주었다. 한 겨울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심야전기 보일러는 오후까지 아랫목 윗목도 없이 뜨듯하다. 가령 서울 노숙자들이 빵을 타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모습에 비하면 농촌은 그래도 푸근한 곳이다.
지혜 있는 농민들은 이런 때에 빈둥거리고 등허리만 펴는 것이 아니고 농사지식과 농업기술을 축적한다. 여러 잡다한 얘기 속에 시행착오가 있고 성공사례가 있다. 머리 나쁜 사람들은 그것을 수첩에 적기도 하고 노트에 기록을 하기도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터넷에서 널려 있는 영농지식을 퍼오기도 한다. 농한기는 농민의 충전기간이다.
4-H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마을에 여럿 있다. 매곡면 산업계의 최준식 계장도 영동군4-H연합회 회장을 지낸 4-H맨이다. 최 계장을 통해 이 고장에서 활동하던 동지들 얘기를 한 자리에서 듣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번번이 안 되었다. 모두들 한가하게 마을회관 같은 데에 있지를 않았다. 서로 시간들이 안 맞고 일이 있었다. 하루 전에 연락해 가지고는 회동이 가능하지 않았다. 우선 최 계장부터 내일 대전에 볼 일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전리에서 포도농사를 하는 정상화씨를 최 계장 시간에 맞추어 아침 9시에 면에서 만나기로 했다. 상촌 돈대리에서 포도,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이무영 씨는 서울에 약속이 있어서 새벽같이 가야 한다고 하고 하도대리에서 인삼농사를 6만6000㎡나 짓고 있는 남승일 씨는 오늘이고 내일이고 바빠서 만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부인 박정선 씨도 같이 활동을 하던 4-H 커플이다. 모두들 50대들이다.
김정일 사망으로 철야 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최 계장을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근무 중이라 술도 한잔 할 수 없이 접대용 쌍화차를 한 병씩 마시며 밋밋한 대로 밤늦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20년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4-H활동 체험이 모든 삶을 이끌어가는 인센티브였다고 하였다. 학교 졸업장뿐 아니고 지덕노체(智德勞體)의 장전을 또 하나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
“81년 고졸 때부터 좀 늦게 활동을 하였는데 경진대회에 한 번 나가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그래서 이무영 선배에게 부탁도 했었지요.”
상은 못 탔지만 현장감 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앞서 가는 영농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시골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인관계가 넓어지고 나만의 이해득실만 따지지 않고 이웃과 나누고 지금은 FTA이지만 그때 우루과이라운드에 대처하는 농촌사회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 녹색혁명의 깃발을 들고 퇴비증산, 농약 공동방제,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 보름 복조리 판매 등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4-H에 몸담았다는 것에 대하여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영동군의 경우 회원이 600여명 되었다. 70년대 중반에 4-H회, 70년대 후반에 새마을청소년회, 80년대 후반에 다시 4-H회로 되었다. 마을 어귀마다 있던 크로바 네 잎에 활동 덕목을 새긴 표석은 지금은 볼 수 없고 농업인 단체, 농촌지도자 영동군연합회, 생활개선회, 농업경영인 영동군연합회, 여성농업인 영동군연합회, 영동군4-H연합회, 크로바동지회 등의 하나 또는 둘로 자리 잡고 있다. 영동인터넷고교 등의 학교4-H 활동이 또 있다.
이무영 씨와 남승일 씨는 전화로 얘기하였다. 이무영씨도 영동군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4-H활동을 하면서 많은 영농지식을 배웠다고 했다. 농촌지도소, 지금은 농업기술센터가 되었는데 거기에 많이 나갔고 작목반 활동을 했는데 그런 것들이 그후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아침에 트럭을 타고 온 정상화씨와 면사무소 앞 매화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하였다. 알고 보니 그의 옆집에 살던 그 때는 아이였다. 지금은 50대 중반, 그의 집은 땅을 다 팔아 물 건너 유전리에서 발동기 방앗간을 하였었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는 바람에 알거지가 되어 진해로 인천으로 서울로 떠돌아다니다 낙향하여 노천리 생가, 그것도 그 때 폭격으로 불탄 것을 다시 지어 살고 있다. 왜 그랬던지 그의 집만 소이탄을 맞았던 것이다.
정상화씨는 20년 전 17대 회장을 하였으며 크로바동지회 회장도 하였다. 4-H회장 출신 모임이다.
“얼마 전 4-H 60주년 기념탑을 영동군 농업기술센터 마당에 세웠지요. 지금 영동에는 영농4-H회원이 20여명 학생4-H회원이 1000명 넘게 있어요. 후원회 기금도 7000만원인가 있고.”
“그렇군요.”
지난 11월 18일에는 영동체육관에서 농업인 6개 단체가 모여 농업인의 날 행사를 하였다.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십일(十一)을 종서로 썼을 때 흙 토(土)자가 되고 그것이 겹친 날이다. 그런데 영동군에서 유치한 종합행정학교 준공식 관계로 날짜를 옮긴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 뒷전으로 밀린 것이다. 어떻든 열기 있는 화합의 한마당을 우렁차게 펼쳤다.
“좋은 정신 잘 이어가야 하는데……”
“4-H정신이란 무어라고 생각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생각하는 농민이 되는 기라요.”
지혜롭게 나보다 이웃을 위해 노력하며 건강하고 건실하게 사는 것,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것보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뜻을 세워 산 젊음이 평생 보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듣다가 전화가 와서 받는데 커피 값을 정상화씨가 냈었다. 그가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1000원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하였다.
커피 한 잔에 1000원 하는 시골 다방 풍경을 상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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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농한기에도 도무지 한자리에 앉아 얘기할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래서 밤 늦게 만나고 전화로 묻고 하였다. 사진도 두 사람이 아침 일찍 찍을 수밖에 없었다. 매곡면 사무소 앞에서 오른쪽부터 최준식 계장, 신영철 면장, 정상화 전 영동군4-H연합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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