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관리로 나아가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 시험이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식년시와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시험이 있었다. 부정기적인 시험은 국왕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하고 실시한 알성시,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치러지는 증광시, 나라에 작은 경사가 있을 때 치러지는 별시 등이 있었다.
과거 시험의 꽃이라는 대과(문과)에서는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등 모두 33명을 뽑았다. 장원 급제라 일컬어지는 갑과 1등은 종6품, 갑과 2등과 3등은 정7품, 그 밖에 을과와 병과의 급제자들은 정8품, 종9품의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하면 전국에서 수천, 수만 명의 선비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30~35세쯤 되어야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니,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모른다. 율곡 이이 같은 사람은 첫 시험에서 20대 초반에 거뜬히 합격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번 낙방한 끝에 겨우 합격했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고종 때 사람인 박문규다. 그는 1887년(고종 24년) 개성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고종도 그의 급제에 깜짝 놀라며 특별히 정3품 당상관인 병조참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평생 과거 공부에 온힘을 쏟은 탓인지, 다음 해에 가선대부, 용양위호군에 오른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박문규의 경우가 그렇듯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양반집 자식들이나 선비들이 과거 급제를 위해 어려서부터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20, 30대를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50살이 넘어도 합격하지 못해 결국 포기하고 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과거가 이처럼 어려우니, 부정행위(컨닝)를 저지르는 선비들이 꽤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47년(세종 29년) 3월 16일 의정부에서 과거시험의 부정행위에 대해 세종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신하들이 벼슬길에 나설 때에 먼저 속임수를 쓰면, 양심을 저버려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남의 재주를 빌려 답안을 쓰거나 남을 대신하여 답안을 써 주는 사람, 중간에서 서로 통하게 하는 사람은 곤장 백 대와 징역 3년의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리고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는 등 부정행위를 돕는 관리도 똑같이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도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몰래 책을 들고 들어가 베껴 쓰는 사람, 옛날 사람이 지은 글을 표절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사람, 예상 답안을 종이에 미리 적어, 그 종이를 콧구멍이나 붓대 끝에 숨기는 사람, 글 잘 쓰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대신 답안을 쓰게 하는 사람, 시험 제목을 가시 울타리 밖에 알려 다른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한 뒤, 시험장의 군졸을 매수하여 그 답안을 가져오게 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자기 답안지와 맞바꾸는 사람, 시험관과 짜고 자기 답안지를 시험관이 알아보도록 암호를 표시하여,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게 하는 사람 등등 선비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그러자 영조 때는 부정행위를 한 사람들의 합격을 막아 보려고 이런 방법을 쓰기까지 했다. 합격자 발표 다음 날 합격자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자기 답안지를 외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답안지를 외우지 못하면 남이 써 준 것으로 보고 합격을 취소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1만 513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던 과거 시험은 848회를 채우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결국 폐지되었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면서요?
중국에서 관리 등용 시험인 과거 시험이 시작된 것은 수나라 초대 황제 문제 때였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까지 1200년 동안 계속 시행되었는데, 유능한 인재를 공정하게 뽑기 위해 엄격하게 시험 감독을 했다.
명나라 때는 수험생 수백 명이 외부와 차단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수험생은 음식ㆍ침구ㆍ붓ㆍ초ㆍ요강 등을 준비했고, 책은 따로 챙길 수가 없었다. 물론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부정행위를 막으려고 몸 수색을 받았다. 시험은 일주일 동안 치러졌는데, 시험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수험생들은 저마다 방 하나씩을 제공받았다. 이 방은 한쪽이 뚫린 채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시험관이 눈에 불을 켠 채 이들을 감시했다. 남경에 있던 시험장인 강남공원은 무려 방이 2만 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철저히 시험 감독을 해도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몰래 책을 들고 들어가 베껴 쓰는 사람, 경전을 깨알같이 써 넣은 속옷을 입고 들어온 사람, 예상 답안을 써 놓은 종이를 만두 속에 숨겨 온 사람도 있었다.
청나라 때는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적발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1657년 북경, 남경 향시 때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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