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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속엔 아들의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
서울숲엔 은행나무 숲이 있다. 바람 부는 날 숲에 서면 폭죽이 터지듯 노오란 은행잎들이 허공을 날아오르다 별똥별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가을이면 나무는 자신이 가졌던 제일 좋은 것을 남김없이 땅으로 보낸다. 그 아름다운 선물을 보기 위해 나는 숲으로 간다.
숲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유치원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소중한 보물을 찾듯 은행잎을 줍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주운 은행잎을 내 옆 의자에 앉아있던 엄마에게 달려와 보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 엄마가 말했다. “이건 벌레 먹은 거네.” “그래도 예뻐요!” “이건 끝이 찢어졌네.” “그래도 예뻐요!” 아이에겐 모든 게 신기하고 예뻐 보이는 모양이었다. 팔딱팔딱 신나게 뛰어다니며 은행잎을 줍던 아이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 스스럼없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낌없이 은행잎 한 장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거 내가 주운 거예요. 선물이에요.” 아이 눈은 티 없이 맑았고 두려움이 없었다. 지팡이를 짚은 아저씨를 졸졸 뒤따라 간 아이가 은행잎을 내밀고 돌아서자 아저씨의 굳어있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게 보였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나는 아이가 건네 준 은행잎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잎에서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천진하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들어있는 귀한 선물!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덟 살짜리 꼬마는 눈송이를 뭉쳐 냉장고에 넣어두고 선물할 사람을 찾아 나선다. 구멍가게 아저씨는 눈송이에 상표를 붙여 병에 넣어 팔겠다고 하고, 병원의 렌즈박사는 눈송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하고, 철학자는 이렇게 되물었다. “넌 눈송이가 표시되길 바라니? 인식되는 대상이길 바라니? 본질적으로 그건…” 아이는 모두에게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눈송이 선물을 받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 듯 바라볼 텐데….” 그러자 아이는 기뻐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눈송이는 이미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눈은 녹아 사라지지만 네 영혼이 느꼈던 아름다움은 아무도 뺏아갈 수 없단다.”
나도 그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얼마 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들이 새벽 1시가 넘어 집으로 온 것이다. 그 아이 집은 멀고 술이 취해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아이는 내 방으로 와 잠자고 있는 나를 안아주더니 내 책상 쪽으로 가 무언가 부시럭거리다 방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 아이를 출근 시키고 나서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를 열었다. 그 속엔 오만 원짜리부터 천 원짜리까지 지갑을 몽땅 털은 돈이 들어있었다. 나는 울컥했다. 자식의 전 재산을 받은 엄마는 흔치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일주일 용돈이었기에 돈을 들고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돈을 나란히 펴 놓았다. 냉장고 안에 눈송이를 집어넣듯 아들은 컴퓨터 속에 돈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 재산이었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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