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농민들 농업기술 발전과 우의증진에 멍석을 깔다 (2-1)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공교롭게도 한국4-H와 4-H국제교환훈련(IFYE프로그램)은 1947년생들로 동년배다. 용맹스러운 두 쌍두마차는 7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익장을 자랑한다. IFYE 수료생들은 과거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서 넓은 바다로 방사된 것이다. 세계 농업 발전,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세계 농민들의 우정 증진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끽하도록 하였다.
4-H운동과 IFYE는 발생 초기부터 풀뿌리운동, 초근대사(草根大使, 근래 이 귀중한 용어를 정치계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분별없이 사용하여 안타깝다)라 지칭되면서 현재 세계 75여 국가에서 4-H와 유사한 농촌청소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IFYE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저개발국들은 자국의 농업발전과 농촌청소년들 실천교육지도기술 공유를 위해 매년 참가인원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2년 첫 사업을 시작한 후 오늘날까지 많은 해외파견생과 외국초청생을 상호 교환했다.
첫 IFYE사업 역시 미국이 종주국이다. 1947년 미국 National 4-H Founda tion(현 Nat’l 4-H Council)은 미국 농무성(4-H and Young Men’s & Wo men’s Program)의 지원을 받아 초년에 17명의 미국 젊은 4-H 출신자들과 유럽 6개국 남녀 12명(당시 유럽에는 주로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가톨릭 농촌청년회 동 농사학습클럽 등이 활동하였고,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와 구소련 점령국들인 발트해 연안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개신교국들의 4-H Club 활동이 왕성했음)을 상호 교환함으로써 IFYE의 소중함과 유익성에 교환국들이 크게 관심을 갖게 된다.
IFYE 개시 42년 째 되는 1989년까지 미국 1만3000여명, 세계 여러나라 참가국 교환생(주로 미국 농촌 파견) 1만2000여명이 참가하는 실적을 올렸다. IFYE는 점차 미국의 저개발국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확대되어 아시아에서는 1955~1957년에 일본, 네팔, 필리핀, 대만 등이 참가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당시 경제적 자립도가 낮아 이 값지고 귀중한 국제적 4-H프로그램에 참가할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1957년 태국에서 개최된 첫 4-H국제회의에서 미국4-H재단의 IFYE 담당 Warren E. Schmi dt(1948년 IFYE 독일 파견생)가 회의 벽두 특별행사로 발표한 IFYE를 접한 만경생은 크게 고무되어 회의 휴회 시간에 수차례 Schmidt와 접촉하여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귀국 후 바로 한·미간 교환사업을 실행하고자 여러 관계기관과 접촉하여 4-H/IFYE의 향후 장점에 대해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주요 쟁점은 사업비 조달 문제였다. 즉, 나라 살림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농촌 젊은이들의 미국행(대만행 포함) 값비싼 항공요금을 지불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 소통이 거의 안 되는 상황에서 미국 농가에 파견하여 기술을 연수한다는 것도 힘들다고 본 것이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경생은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한 끝에 우선 미국 경제협조처(USOM)에 요청하여 마침내 1962년 한·미 교환계획에 대한 예산을 확보했다. 주요 내용으로 한·미 교환생 각각 2인, 총 4인에 대한 항공여비는 미국 ICA에서 제공하고 한국 체류비용 일체(보험료 제외)는 농진청의 정부 보조와 새로 발족한 4-H협조위원회에서 지원토록 하였다. 또한 참가자 선발은 각 도 농업기술원 추천자를 중앙심사위원회(농진청, 협조위원회와 한·미재단은 만경생이 대표로, 4-H중앙위원회, USOM 대표로 구성)에서 최종 선발토록 했다.
대만 파견생 2명의 여비는 2년간 책정되지 않아 이들을 대한해운공사 화물선편으로 무료(선장실 활용. 타이페이항 도착하면 대만사건회가 마중나옴)로 파견하는 불편도 겪었다. 제1차 파견생들이 귀국한 후 한국, 대만, 미국 내·외국인 각각 1명씩 6명을 서울 로타리클럽(Rotary 서울, 회원 약 150명) 정기 월요회(반도호텔, 현 롯데호텔 개최)에 참석시켜 활동 경험을 5분 이내로 발표시켰다. 이 발표는 큰 호응을 얻어 이후 대만 파견 한국 교환생 2명에 대한 왕복 항공요금을 후원받게 되었다. 로타리클럽 회원들의 즉각 모금식 모금으로 2년 연속 지원을 받은 후 국고 보조를 얻어 사업을 계속하게 된다.
당시 만경생은 이 귀중한 4-H/IFYE 프로그램 책임 집행자로서 지속가능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미디어를 활용하기로 하고 지방 방송국, 신문사, 각급 학교, 중앙 TV는 물론 농촌진흥청 홍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4-H와 IFYE 알리기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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