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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격주간 제8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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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환의 고전산책] 차례(茶禮)와 제사(祭祀) |
"명절에는 그 시기에 나는 것으로 상을 차려라
俗節則薦以時食(속절칙천이시식)"
- 《격몽요결(擊蒙要訣)》 중에서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왕이었던 경공(頃公)이 공자를 만난 후 그를 기용하려고 하자 당시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안영(晏)이 반대하며 “자고로 유가의 사람들은 번잡스럽게 제사의 절차나 따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공자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안영은 당시 중국 내 최고의 재상으로 이름이 높던 사람이었다.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고, 근검절약하여 고기도 멀리했다.
박학다식했으며 아부를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가볍게 하라’는 주장을 펴던 사람이었다. 그런 안영이 공자를 비난하며 내세운 논거가 장례와 제사였으니 유가에서 장례와 제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주변을 둘러봐도 제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지닌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죽은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고’, ‘절차가 너무 복잡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영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이러한 비판은 적절한 것일까?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에는 공부와 사회생활 등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장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부분과는 달리 장례와 제사의 절차를 깨알같이 구체적으로 적고 있으니 무게의 중심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율곡도 장례와 제사에 집착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아니다’가 정답이다. 율곡은 ‘장례와 제사는 주자가 만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자가 왜 ‘주자가례’를 만들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주자는 극도로 번잡스럽고 사치스러워진 송나라의 장례와 제사를 보며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며 공자와 마찬가지로 귀신을 믿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제사와 장례에 대해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책으로 엮은 이유는 이를 간소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절차에만 매달리는 가짜들에게 보내는 비판이었으며 주변 사람들을 따라하려다가 절망하며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라는 신호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율곡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자가례’를 언급하면서도 주자보다 더 간결하고 쉬운 절차를 제시했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와 생활환경의 차이를 고려하여 우리나라 스타일을 제시한 것이다.
어동육서(魚東肉西)나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복잡한 규칙은 주자도 율곡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곡이 강조한 것은 ‘신종추원(愼終追遠)’이었다.
‘장례는(終) 조심스럽게(愼) 하고 제사는 조상(遠)님들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따르라(追)’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절차가 아니라 마음이다.
장례는 슬픈 마음의 표현이고 제사는 조상의 뜻을 생각하며 조상들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자리다.
죽은 사람이 음식을 먹으라고 제사상을 차리는 게 아니라 흩어진 친지들이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친목을 다지라고 차리는 것이다.
추석(秋夕)이다. 차례(茶禮)는 약식(略式)으로 치르는 제사다. 율곡은 차례에 대해 “명절에는 그 시기에 나는 것으로 상을 차려라(俗節則薦以時食)”고 조언했다.
근거도 희미한 각종 규칙에 얽매일 게 아니라 율곡이 말해준 것처럼 요즘 흔한 음식으로 정갈하게 상을 차린 후 ‘신종추원(愼終追遠)’하며 친지들과 맛나게 밥을 먹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본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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