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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격주간 제8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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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착한나들이] 청계천 영도교를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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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불빛이 징검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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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듯 영도교를 찾아나섰다. 청계천엔 22개의 다리가 있다. 그 중 영도교는 단종과 그의 아내 정순왕후가 헤어진 역사적인 곳이다. 나는 2호선 신당역에 내려 곱창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 끝에서 영도교를 만났다. 다리에 선명한 영도교란 글씨를 보니 왠지 코끝이 찡해왔다. 조선시대엔 장삼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이 다리 위를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핸드폰을 든 아가씨가 찢어진 청바지를 펄럭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단종처럼 불운한 왕도 없다. 단종은 세종대왕의 장손이자 문종의 장남이다. 단종은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를 잃고 이어 아버지 문종도 죽는다. 12세에 왕이 되었지만 그는 혼자였고 삼촌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였다. 마침내 극한의 공포 속에서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이양하고 영월로 귀양가 사약을 받는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단종에겐 부인 정순왕후가 있었다.
둘의 사랑은 지극했으나 정순왕후는 단종을 따라 영월로 가지 못했다. 눈물로 애원했지만 끝내 세조는 둘을 갈라놓는다. 단종은 영도교를 건너다 오열하는 아내를 향해 돌아가라고 손짓했다고 한다. 그것이 영영 이별이었다.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다리라는 뜻으로 영도교가 되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자 정순왕후는 늘 앞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그녀는 세조의 도움을 거절하고 시녀가 동냥해온 것과 염색 일로 끼니를 이으며 연명하다 82세 나이로 운명한다.
단종의 비애를 간직한 청계천엔 또 다른 가슴 아픈 다리가 있다. 1965년 청계천엔 22살 젊은 청년 전태일이 있었다. 당시 열악했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인권침해 개선을 외치며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었던 전태일. 그는 온몸에 불을 붙이고 청계천을 뛰어다녔지만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 곁으로 돌아와 있다. 그의 동상이 버들다리에 세워지고 이름도 전태일 다리가 된 것이다.
가로등이 켜진 후 나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길을 따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징검돌을 따스하게 비춰주고 맑은 물줄기는 도시의 소음을 힘차게 지우며 흐르고 있었다. 버들이 늘어지고 여러 종의 물고기와 야생조류가 살아가는 청계천! 그러나 예전엔 홍수의 범람으로 골칫덩어리가 된 적도 있었고 오염으로 전염병이 돌아 콘크리트에 덮여 자동차 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물줄기로 태어나 관광의 명소로 변신했다.
솔개의 수명은 70살 정도인데 나이 마흔이 되면 죽느냐 사느냐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바위산으로 올라가 부리를 바위에 쪼아 낡은 부리를 뽑아낸 후 새로운 부리가 나오면 노화한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나오면 온 몸의 털을 뽑아내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 30년을 더 산다고 한다.
오래 살려면 변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오래 사는 것들은 끝까지 지켜낸 사랑 이야기거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세상을 바꾼 용기이거나 생명을 키우는 물소리다.
나는 청계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지금 이대로 좋은가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을 위해 바위산으로 올라가야 하는가?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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