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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나비들이 항복의 긴 시간을 견뎌야 날개 달리는 봄이 온다. |
차갑고 맑은 봄빛을 따라 남한산성엘 갔다. 산성엔 이미 봄빛이 가득하다.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 간판에도 봄빛이 쨍하고, 형제 같이 보이는 성당, 교회, 절에도 사이좋게 봄빛은 나누어진다. 아픔 없는 봄이 없어 성당 앞에는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지고 절은 절대로 불타 없어졌던 기억을 간직한 채 엎드려 있다. 폐교의 위기를 넘기며 103년을 이어온 남한산초등학교에선 아이들 소리가 불어난 강물처럼 푸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을 품고 살아온 성이다. 성안의 사람들과 함께 병자호란을 겪으며 죽었다 살아난 성이다. 왕이 산성에 갇혀 47일 동안 싸우다 끝내 항복한 곳. 그 징한 아픔을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나는 견디고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 남한산성으로 간다. 아픔을 간직한 성에 들면 하늘은 더 파랗고 바람은 시리도록 맑다.
그리움처럼 휘돌아가는 성곽을 따라가다 서문에서 발을 멈추면 발아래가 보인다. 제2롯데월드타워 등 고층 건물들이 가득한 내가 사는 세상이 보인다. 서문을 나온 인조가 얼어붙은 산길을 미끄러지며 내려가 청나라 칸을 향해 맨 땅에 머리를 아홉 번 찧으며 항복한 곳도 저 아래다. 강한 자 앞에서 약한 자의 삶은 늘 치욕이지만 겨울을 견디면 봄이 오듯 항복한 자리도 아물어 현대문명이 찬란하다.
남한산성엔 정문보다 암문이 훨씬 많다. 암문은 전쟁 당시 비밀통로로서 겨우 허리를 숙이고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좁지만 안에서 보면 밖이 환하고 밖에서 보면 안쪽 빛이 더욱 희게 도드라져 나를 끌어들인다. 정문은 문을 닫으면 길이 끊기지만 암문은 엽전처럼 양쪽으로 길이 뚫려있다. 삶에도 닫힌 길과 열린 길이 있음을 배운다.
길들이 이어지는 성곽 길을 걷다보면 산성에 있는 마른풀 하나 돌멩이 하나도 그냥 살아온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마른풀은 굶어 죽어가는 말들의 양식이 되고 돌멩이는 성벽을 타고 오르던 적군을 향해 날아가던 아픈 순간이 있었다. 싸우다 죽은 병사들이 얼어붙은 빨래처럼 성벽에 널려 있던 현장에서 보았다. 벌어진 성벽 틈 사이에서 작은 새가 노래하는 걸. 총알이 날아다니던 자리가 참아낸 힘이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물으러 산성에 간다. 그들은 그들이 견뎌내야 할 몫의 아픔을 견뎌 냈고 나는 오늘을 견뎌 내야 할 아픔이 있기에. 당시 청으로 끌려간 포로들은 구십 리에 이어졌다. 볼모로 끌려가는 세자와 왕자와 빈궁들을 왕이 길에 나와 바라보고 있었다. 항복을 하고 살자는 신하와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신하 사이에서 임금은 살기로 결정했다. 치욕을 견디는 굴복은 잠시고 삶은 영원하다.
다가가지 못한 성벽에 눈인사를 보내고 아래로 내려오다 나비 한 마리를 만났다. 아직은 응달이 눈을 숨긴 삼월 초인데 나비라니? 나비는 가랑잎 위에 앉아 있었다. 얼었다 녹았다 바싹 말라 버린 시간 위에 앉아 정갈한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잎이 떨어져야 겨울이 오고 세상의 모든 나비들이 항복의 긴 시간을 견뎌야 날개 달리는 봄이 온다. 나비는 내 발소리에 놀라 일어섰다. 그리고 긴긴 겨울에 하직 인사를 하듯 성곽 위를 한 바퀴 돌아 산 아래로 훨훨 날아갔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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