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5 격주간 제793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실망하지 말라, 힘차게 나아가라

"밤은 아침으로 가고 낮은 밤으로 간다. 이게 진리다.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 《주역(周易)》 중에서"


‘동양철학자’라는 말은 ‘점쟁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곤 했다. 요즘도 길거리를 지나다보면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보게 되는데, 그런 곳은 대부분 점쟁이 사무실이다.
만약 ‘서양철학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타로카드를 해석해 주는 사람, 혹은 점성술사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 ‘서양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더 나아가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떠올릴 것이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왜 이토록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게 된 것일까. 글자 그대로 말한다면 ‘동양철학자’는 동양의 철학자를 뜻하고 ‘서양철학자’는 서양의 철학자를 뜻한다. ‘서양철학자’하면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스피노자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양철학자’라고 하면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주자 등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율곡과 퇴계, 다산도 ‘동양철학자’다.
조금 더 들어간다면 서양의 철학 이론에 입각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 ‘서양철학자’고 동양의 철학 이론에 입각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 ‘동양철학자’다. 우리나라에서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공부한 학자는 서양철학자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공자나 맹자의 사상을 공부한 학자는 동양철학자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와 다르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점쟁이가 동양철학자라고?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왜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점을 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주역(周易)’을 기본 교과서로 삼는다. 그런데 이 ‘주역(周易)’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철학서다. 철학서인데 그것으로 점을 칠 수도 있다. 마치 칼로 무예를 닦을 수도 있지만 고등어를 다듬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주역(周易)’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아련히 멀고 높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지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실천해야할 삶의 지혜다. 그래서일까?
철학은 뒤로 밀어놓고 점만 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철학 공부는 어렵지만 점을 치는 기술 공부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니 철학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적고 점을 치는 기술로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졌다. 당연히 ‘주역(周易)’을 공부한다고 하면 점쟁이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닷가를 잠시 거닐고 바다를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닷가도 바다에 포함되지만 그것이 바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망망대해와 바닷가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서울에 있는 남산도 산이지만 남산을 보았다고 설악산이나 백두산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인 것과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점을 치는 기술서로 ‘주역(周易)’을 활용하더라도 ‘주역(周易)’에서 나오는 점괘에는 좋은 점괘와 나쁜 점괘가 따로 없다.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면 좋게 되고 적절하지 않게 대응하면 나쁘게 될 뿐이다.
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은 사람도 그 반대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결과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면 된다. 시험 점수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기억하라. “어두운 곳에 있으면 곧 밝아진다. 밝은 곳에 있다면 곧 어두워진다. 상황에 적절히 움직이는 것, 그것이 올바른 길이다(一陰一陽之謂道).”
지금 성과가 좋다면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지금 성과가 나쁘다면 더 열심히 하라. 동양철학은 죽음의 지혜가 아니라 삶의 지혜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천국으로 만드는 지혜다. 그 중심은 실천에 있다. 상황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말라, 힘차게 나아가라.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목록
 

간단의견
이전기사   4-H다이어리
다음기사   글로벌 위기 해결 위한 4-H운동 새로운 100년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