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5 격주간 제793호>
[이 달의 착한나들이] 음악, 그 따뜻한 품 속으로
서울숲에는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가 있는 숲은 맑은 소리를 낸다.

서울숲엔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가 있는 숲은 맑은 소리를 낸다. 개구쟁이들이 딩동거리고 노인들도 슬며시 건반을 눌러보고 연인들도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기도 한다.
낙엽 지는 가을날이었다. 서울숲을 걷다가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쨍한 가을 하늘에 닿았다가 내 가슴에 와 부서졌다. 바위를 때리는 하얀 포말처럼 슬픈 전율이 느껴지는 대단한 솜씨였다. 나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갔다.
피아노 앞엔 중학생 정도의 소녀가 앉아 있었고 피아노가 있는 계단 아래엔 엄마인 듯한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뒤에서 봐도 그녀는 어딘가 아파 보였다. 기울어진 어깨에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머리에 보라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며 그녀를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야윈 볼에 눈물이 하염없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딸은 혼신을 다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오직 엄마를 위해 연주하는 듯했다. 피아노 위로도 엄마의 털모자 위로도 쉼 없이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아이의 하얀 손끝에서 피어나는 음표들이 내 안에 낙엽처럼 날아와 쌓였다. 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타인의 아픔을 공명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 그러나 음악은 그 한계를 단숨에 넘는다.
‘낙타의 눈물’이라는 다큐를 본 적 있다. 극심한 난산으로 고통을 겪은 어미 낙타는 가끔 자기 새끼를 발로 차고 젖도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는 습성이 있다. 새끼가 굶어 죽기 직전 어미 낙타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은 하나뿐, 그것은 음악이다. 몽골악기인 마두금을 어미 낙타 앞에서 애절하게 연주하면 낙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모성을 회복해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다. 낙타가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나도 낙타를 따라 펑펑 운 기억이 난다. 음악은 동물도 참회하게 만든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새끼는 굶어죽었을 것이고 어미 낙타는 새끼를 죽인 비정한 어미로 살았을 것이다.
음악은 사람도 살아나게 한다. 조용필의 ‘비련’이라는 노래에 얽힌 사연을 잊을 수 없다. 14년 동안 감성이 마비된 채 살아온 지체장애인 소녀가 ‘비련’을 듣고 눈물을 흘렸단다. 놀란 부모가 조용필에게 병원으로 찾아와 아이에게 비련을 불러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4개의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까지 물어주면서 소녀에게로 달려간다. 당시 조용필의 하루 출연료는 삼, 사천만원 정도라고 했다. 소녀는 노래를 듣는 내내 펑펑 눈물을 쏟았고 부모도 함께 울었다. 노래를 마친 조용필에게 소녀의 엄마가 돈 이야기를 하자 그는 “따님 눈물이 제가 지금까지 벌었고,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 라며 돈을 거절했다고 한다.
진정 소중한 것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공기나 태양이 그러하듯.
성경은 지옥에 대해 70번, 음악에 대해 839번 이상을 말했다고 한다. 지옥도 감히 음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강풍보다 태양이 우리의 외투를 벗게 하듯 음악은 말보다 위대하다. 서울숲에서 나를 울린 소녀의 피아노 소리는 천 마디의 말보다 애절하게 내 안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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