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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 격주간 제7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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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착한나들이] 내가 만난 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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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하나 차지하기 위해 세상은 동분서주하며 남을 모략하지만, 누군가는 길가는 사람을 위해 대문 앞에 의자를 준비한다. 말없이 의자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오르막길에 쉼터를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
얼마 전 인덕원에서 51번 버스를 타고 가다 눈에 확 띄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은 동화 속 풍경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아파트가 아닌 주택들이 푸른 산을 배경으로 오밀조밀 모여 있고 뒤로 성당의 둥근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나는 강렬한 충동에 이끌려 버스에서 내렸다. 정인(情人)처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가 남다른 마을이었다.
빨간 벽돌 주택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보니 체코의 프라하성에서 본 붉은 집들과 성당이 떠올랐다. 오래된 집들은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다. 집집마다 꽃이랑 나무가 있어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그런데 의자 세 개를 대문 앞에 나란히 내놓은 집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대문에 메모가 붙어있었다. ‘이 의자는 쉬어가는 의자입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담장에 핀 장미의 향을 깊이 호흡하면서 나도 붉게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보통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 마련인데 메모까지 붙여 놓았으니 쉬는 마음이 내 집처럼 따뜻했다. 나는 의자를 어루만지며 그 집을 떠났다. 어떤 길은 나를 자꾸 돌아보게 한다.
마을을 지나 언덕에 있는 성당까지 올라갔다. 성당은 푸른 숲에 둘러 쌓여있었다. 건물도 자연 속에 있을 때 다가가고 싶어진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당을 지나자 막다른 길 끝에 터널이 나왔다. 돌아서려 하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나비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터널을 통과했다. 터널을 나오니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없었다. 푸성귀를 심은 밭을 지나 길은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저만치 부서진 폐가가 보였다. 문득 내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난 긴장했다.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홀린 듯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은 울창했고 길은 등산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 이름은 의왕시의 모락산이었다.
고개 숙이고 오르막을 오르다 누군가 날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플라스틱 의자였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났다. 누가 산속까지 의자를 가져다 놓았을까? 다가가보니 낡은 의자였다.
그러나 주인은 철사로 깨진 곳을 꿰매고 흔들리지 않도록 의자를 나무에 정성껏 묶은 후 수평이 되도록 다리에 나무 받침까지 대어놓았다. 그 세심한 배려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어 흰 구름을 보니 왠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참 묘한 날이었다. 아까는 대문 앞에서 의자를 만났고 지금은 산에서 의자를 만나다니. 세상에 의자는 많지만 오늘 만난 의자처럼 행복한 의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맑은 공기와 새소리와 솔바람을 선물하는 산속 의자. 그날 이후로 나는 모락산을 가끔 찾는다.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아카시아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걸 고요히 바라보기도 한다.
선거일이 지났다. 거리엔 플랜카드와 공약이 요란했다. 의자 하나 차지하기 위해 세상은 동분서주하며 남을 모략하지만, 누군가는 길가는 사람을 위해 대문 앞에 의자를 준비한다. 말없이 의자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오르막길에 쉼터를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의자가 기다리는 산. 오늘도 내 마음은 그 산으로 향한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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