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과 지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
古今異便 風俗不同(고금이편 풍속부동)
- 《주자가례(朱子家禮)》 중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대해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유학에서는 다섯 개의 개념을 내세우지 않나요? 그래서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에 신(信)을 더하여 오상(五常)이라 하고, 그것을 사람이 항상 실천해야 하는 5가지 덕목(德目)으로 삼지 않나요?”
다시 설명하지만 유학이 내세우는 것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정 불변하는 것을 꺼린다.
공자가 하지 않은 네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확실하지 않는데도 지레짐작으로 단정을 내리거나(의;意), 반드시 이루려고 무리를 하거나(필;必),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거나(고;固),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것(我;아)이 그것이다. 상황에 맞게 적절히 하는 게 공자의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유학은 변화를 살피고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철학자들의 여러 가지 설명은 고정 불변하는 개념이 아니다. 적절히 하라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인의예지(仁義禮智)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이 복잡다기해지자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하나 둘씩 설명이 추가된 것이 있을 뿐 그 원리가 바뀐 것은 아니다.
공자는 큰 틀에서 인(仁)에 집중했고, 맹자는 여기에 의(義)를 붙여 설명하며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했다. 이후 시간이 흐른 후 한대(漢代)에 이르러서 동중서(董仲舒)가 처음으로 이것들에 신(信)의 덕목을 추가하며 오상(五常)을 말했을 뿐이다.
자질구레한 예법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주자가 정리한 예법에 관한 책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라. “옛날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것과 지금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게 서로 다르다. 사회와 문화 환경도 예전과 다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古今異便 風俗不同).”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주자가 이야기한 예법은 예전의 것을 무작정 따르는 게 아니었다. 오늘날 사정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고 변화시킨 것이다. 그 정신을 따라야지 주자의 손가락 모양새를 따르려고 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예법뿐만이 아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드러내는 방식 또한 오늘날에 맞게 새롭게 변화해야만 한다. 얽매이는 순간,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어그러진다.
그렇다면 신(信)은 무엇인가? 흔히 ‘믿을 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합쳐진 신(信)은 성실함과 정성스러움을 말한다. 확실함과 실제로도 그러하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사람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천도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의 신(信)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잊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흔들리지 말고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각각의 글자에 담긴 뜻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어깨동무를 하고 존재한다.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의미다. 어느 것 하나를 얻어서 모든 것을 단숨에 파악하게 되는 길은 세상에 없다.
학문에 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단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그러한 행위가 꾸준히 쌓이면 맨 꼭대기에 다다르게 된다. 서둘러서 뛰어가면 중간에 넘어져 다치거나 지쳐서 쓰러진다. 힘들면 쉬고 숨을 고르며 가야 한다.
변화하지 않고 이어가야 하는 것은 그러한 자세에 한정된다. 성실함과 정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게 신(信)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리 맘대로 되던가. 때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회에서 그 해결 방법을 알아보자.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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