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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5 격주간 제7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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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환의 고전산책] 유학(儒學)이 바로 실학(實學)이다 |
얼굴빛만 바꾸지 말라. 호랑이처럼, 표범처럼 개혁하라.
大人虎變, 君子豹變, 小人革面(대인호변 군자표변 소인혁면)
- 《주역(周易)》 중에서
‘유학(儒學)은 윤리·도덕이 아니라 과학이다.’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학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부정적으로 고착되어 있었기에, 지루함을 알면서도, 중앙돌파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제 숨 고르기를 할 때다. 그러나 숨을 돌리기 전에 아직 넘어야할 산이 하나 더 있다. 그 산의 이름은 우리의 역사다.
유학이 추구하는 게 윤리·도덕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그래 좋다, 백번 양보하여 그렇다고 하자. 그럼 그 과학으로 무엇을 구현해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고 제사를 올리는 절차와 방식만 강조하는, 뜬구름 잡는 허망한 학문이 아니라고 인정하겠다. 그렇더라도 역사적 잘못은 어떻게 할 것이냐.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우리의 땅은 일본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 그게 ‘유학은 과학이다.’라는 말로 용서되겠는가.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알려진 신채호는 ‘유학(儒學)’이나 ‘선비’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았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다룬 서적을 모조리 불태우고 학자들을 죽인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기억하는가. 신채호는 그 진시황을 욕했다. “불태우려면 확실하게 깡그리 다 태워서 없앴어야지, 그걸 완벽하게 하지 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피를 토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유학(儒學)과 유학자(儒學者)들 때문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렇다면 신채호는 어디서 학문을 익혔을까? 1880년에 태어난 신채호는 그 유명한 학자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신채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과거시험을 통과한 후에 사간원(司諫院)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사간원(司諫院)은 조선시대 관직 중에 손꼽히는 요직이다. 할아버지로부터 기초교육을 받은 신채호는 이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채호가 배우고 익힌 학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유학(儒學)이다. 그런 그가 왜 유학에 침을 뱉었는가.
신채호가 욕한 것은 유학(儒學) 자체가 아니었다. 왜곡된 유학과 그것을 따른 가짜 학자들을 욕한 것이다. 그는 본래의 유학(儒學)인 실학(實學)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자고 역설했다. 실학(實學)이란 무엇인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사상이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학(實學)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송(宋)나라의 대학자 정이(, 1033 ~ 1107)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주자도 이 말을 이어서 사용했다. 끊임없이 새롭게 개혁하는 것은 유학(儒學)의 기본이념이다. 그래서 유학은 실학이다. 개혁하지 않고 구태만을 이어가는 것은 허학(虛學)이다.
“얼굴빛만 바꾸지 말라. 호랑이처럼, 표범처럼 개혁하라.” ‘주역(周易)’에 나오는 혁괘(革卦)의 설명이다. 스스로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그런 척 하는 게 허학이다. 공자와 맹자가 끊임없이 비판하던 것도 허학이다. 결국 신채호의 유학 비판은 왜곡된 유학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유학(儒學)의 이름으로 세워진 새로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조선은 왕보다 신하들의 힘이 강한 나라였다. 공자와 맹자, 주자가 그토록 역설하던 왕도정치는 무엇인가. 현명한 학자가 정치를 주도하는 것이다. 왕은 그러한 사람을 뽑아 일을 맡기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역설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가 정치 일선에서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던가. 없었다. 유학(儒學)의 고향인 중국에서조차 감히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을 만들어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아니다. 젊은 학자들이 세운 나라다.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학자들이 자신의 뜻을 펼치자고 팔을 걷고 달라붙어 만들어낸 나라다.
그런데 왜 망했는가? 실학(實學)하지 않고 허학(虛學)했기 때문이다. 유학(儒學)의 기본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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