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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1 월간 제7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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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골 통신 (34) 전라도 경상도 말이 섞인 지역 |
-영동방언 자료 조사- 이 동 희 / 소설가
"영동은 충청방언 경상방언
전라방언이 만나는 지역이며
신라어와 백제어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내세로 이어지고 천국이 전개된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원하고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인정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어요.”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참 답답하시네요.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을 왜 못해요. 그래.”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거지요.”
그런 것 같았다. 그랬다.
참 그가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왜 그것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믿고 원하고 인정하면 되는데 도무지 그것이 안 되는 것이었다.
운명이고 팔자였다. 러시아의 속담이든가. 소를 물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한다. 자신이 먹고 싶어야 먹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소고집이라는 말도 있다.
어째 사람하고 소하고 같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건 그냥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고 영혼 영생의 문제이다. 원하면 되는데 원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숨이 꼴딱 넘어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캄캄한 어둠의 세계, 뭔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 지옥이니 연옥이니 하는 고통의 세계로 이어지는 사태에 비하여 풀밭 같은 꽃밭 같은 낙원이 펼쳐지고 아름다운 나라가 열리는 신천지를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왜 그러겠는가. 너무나 쉬운 문제이며 쉬운 답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믿어지지 않고 인정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게 구정물이라 하더라도 먹으라면 먹을 수는 있다. 한 모금 두 모금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계속 마시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다. 좌우간 그는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교 저 종교 많은 편력을 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답이라고 할까 확신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얼마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위선인 것 같다.
“참 내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요?”
“그런가?”
지구종말론, 마야 달력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본다.
연작으로 쓰고 있는 ‘멀리 멀리 갔었네’의 종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는데 계속 머뭇거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최근 일거리를 하나 벌려 놓았다. 영동 방언조사이다.
여기 영동은 말씨가 특이한 지역이다. 전라 경상 도계에 위치한 곳이기도 하지만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역이었다. 충청방언 경상방언 전라방언이 만나는 지역이며 신라어와 백제어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방언 연구의 요충지역이다. 국어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동 태생인 그가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대학에 부임하던 첫 학기에 이곳으로 답사를 오면서부터이다. 그때부터 오랜 동안 영동방언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으로 머물고 있다가 이번 영동군의 방언자료조사 용역사업을 하게 되는 연이 닿았다.
인연이라고 할까, 몇 가지 고리를 연결해 본다. 그동안 소설을 썼다. 50년을 썼다. 대개 농촌 농민 제재 소설이었다. 거기에 방언을 많이 사용하였다. 소설에서의 방언은 대화(dialogue)에 쓴다. 충청방언 영동 방언을 주로 썼는데 영동을 무대로 하고 영동 사람이 등장하는 소설도 그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영동방언을 쓴 것 같다.
데뷔작인 ‘핏들’에서부터 그랬다. 단편집 ‘매화골 사람들’은 향리 매곡을 무대로 매곡 얘기를 쓴 것이고 장편소설‘땅과 흙’, ‘적과 남’, ‘단군의 나라’ 등도 영동 출신 주인공의 얘기이다.
최근에 쓴 ‘노근리 아리랑’, ‘죽음의 들판’, ‘흙에서 만나다’는 영동을 무대로 영동 이야기를 쓴 것이다. 대표적인 충청방언이 아닌 영동지역 방언을 낯선 대로 50여년을 내보낸 것이다.
음운론적 전문적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일반적 또는 대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동에서도 남부 지역 방언을 사용하였다.
경상북도 접경 지역의 독특한 억양인 것이었다. 그런 매곡이 출생지여서 그랬던 것 같다. 전에 얘기한 것 같은데 ‘매화 매(梅)’, ‘골 곡(谷)’의 매화골이다.
피란지 진해에서 살다가 인천에서 살다가 주안 부평에 살다가 서울에서 살다가 무수히 떠돌아 다니며 살았지만 무대는 농촌 시골이었고 농촌 제재의 소설이 아닐 때에도 대화는 여기 고향 말을 사용할 때가 많았다.
또 매곡의 마을 이름 노천리(老川里) 노래는 노내에서 온 것이고 유전리(楡田里) 은 느릅나무밭이 축약된 것이며 이웃마을 옥전리(玉田里) 구샅은 구슬밭이 축약된 것이다 라는 등의 얘기를 어디엔가 쓰기도 했다.
또 말소리를 듣고 사는 출신 지역을 알아맞히는 것이 취미이고 더러 안 맞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적중시키는 것을 내세우곤 했다.
그런 저런 사항 계기들이 이번 용역작업을 연결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학문의 전공성을 잘 알고 있는 필자는 정원용 영동문화원장의 제안을 받고 적임자를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여러 과정이 있었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가 책임을 져야 했다.
모든 일에는 최선이 있고 차선이 있다. 그리고 플러스가 있고 마이너스가 있고 제로가 있다. 이 차선의 작업이 영동문화에 플러스가 되길 기대하며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였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제로이고 일을 해도 플러스가 있고 마이너스가 있는데 그 전자에 속한다고 자위하며 시작을 했고 밀어부치었다.
1965년 교직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 이종흡 교장 선생의 한 마디를 평생 간직하며 살고 있다.
‘논 책임은 없어도 일한 책임은 있다.’ 학교신문을 맡기며 한 말이다. 이번에도 맡은 책임을 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2012년 하반기 주말을 다 반납하고 심혈을 기울여 준 연구팀에 감사하고 자문을 하여준 전광현 선생 그리고 말년에 고향 영동을 위해 허둥대게 해 준 정원용 원장에게도 깊이 감사한다.
연말까지 국판 500쪽 분량의 원고를 넘기게 되어 있다. 지금 마자막 피치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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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말씨가 특이한 지역이다. 충북 내륙 지역과 충남의 남부 그리고 경북 전북의 북서부 접경 지역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 방언이 섞여 있고 전국 국어학 전공 교수들이 학생들과 답사를 하고 논문을 쓴 것이 많이 있다. 이번에 영동방언 조사 자료 연구용역을 맡아 지난 2일 용화에 이어 매곡 방언 조사를 마쳤다.
가운데 필자의 오른쪽 이건식(단국대 교수) 왼쪽 박상진(한국정신문화원 연구원) 배영환(서원대 교수) 그리고 최은영 박효준 오윤정(단국대 3년) 연구팀, 셔터는 최은영이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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