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1 월간 제750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죽어서까지 진평왕의 사냥을 말린 충신 김후직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사냥을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나랏일에 힘쓰기보다는 사냥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진평왕은 사냥을 가지 않는 날은 궁전으로 사냥꾼들을 불러들였다. 물론 사냥꾼들에게 사냥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김후직이라는 신하는 왕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나랏일은 뒷전이고 사냥에만 빠져 지내시니 정말 큰일이구나.’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으로, 이찬 벼슬에 있다가 병부령에 올랐는데, 왕을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왕에게 이렇게 간했다.
“전하, 어찌하여 사냥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십니까?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랏일을 돌보셔야지요.”
그러나 진평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냥꾼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헤매 다닐 뿐이었다.
‘아,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김후직은 날마다 근심에 젖어 지냈다. 그러다가 그만 병이 들어 몸져 눕고 말았다.
어느 날, 김후직은 세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하의 마음을 바르게 돌려 드리지 못해,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너희들은 내가 죽으면 단석산 아래, 방내리에서 송선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나를 묻어 다오.”
김후직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지금의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고개에 아버지를 묻었다. 이곳은 진평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목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진평왕은 사냥을 가려고 신하들과 사냥꾼들을 거느린 채 단석산으로 향했다.
일행이 방내리 북쪽 골짜기를 지나 송선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가지 마시옵소서! 가지 마시옵소서!”
진평왕은 깜짝 놀라 말을 멈춰 세웠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가지 말라구? 이 이상한 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냐?”
“전하, 그 소리는 저 무덤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한 사냥꾼이 길가에 있는 무덤을 손으로 가리켰다.
“보아하니 생긴 지 얼마 안 된 무덤이로구나. 저 무덤이 누구 무덤이냐?”
진평왕이 묻자 한 신하가 대답했다.
“병부령 김후직의 무덤입니다.”
“김후직? 그가 얼마 전에 죽었단 말이냐?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나.”
“전하, 김후직은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전하께서 사냥을 다니시는 길목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진평왕은 말에서 내려 무덤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 그대는 진정 나의 충성된 신하이구려. 죽어서도 그 뜻을 결코 꺾지 않고 내게 간언을 계속 하다니….”
진평왕은 눈물이 글썽했다.
“그대의 충성된 마음과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겠소. 죽어서까지 사냥을 가지 말라고 말리는데, 내가 어찌 사냥을 할 수 있겠소?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사냥을 가지 않으리다.”
진평왕은 무덤 앞에서 이렇게 다짐한 뒤 발길을 돌려 궁전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진평왕은 두 번 다시 사냥을 가지 않고 나랏일에만 힘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충신 김후직의 무덤이 있는 고개는, 김후직이 죽어서도 진평왕의 사냥을 말렸다고 하여 ‘말림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우리나라 왕들 가운데 사냥을 너무 즐겨 신하들에게 간언을 들은 왕이 또 있었나요?”

우리나라 왕들 가운데 사냥을 몹시 즐긴 왕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었다. 그는 무인 출신이어서 말을 타고 자주 사냥을 나갔다. 사간원에서는 이런 태종이 못마땅해, 사냥을 중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태종은 간언을 듣지 않고 몰래 야외로 나가 사냥을 즐겼다. 그러자 사간원에서는 마침내 이런 내용의 상소를 태종에게 올렸다.
‘요즘 전하께서는 몰래 밖으로 행차하시는 일이 잦습니다. 지난번에도 야외로 나가 사냥을 즐기다 돌아오셨습니다. 옛날 왕들은 봄에는 씨 뿌리는 것을 살피고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을 살피는 등, 백성들의 일을 돌보느라 바빴습니다. 요즘 전하께서 밖으로 행차하시는 것은 백성들의 일을 돌보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사냥을 위해서입니까? 엎드려 청하오니 제발 대궐 안에 계시면서 나랏일을 돌보십시오.’
그러나 태종은 오히려 짜증을 내었다고 한다. 사냥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상소를 올렸다고 말이다. 왕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대궐 안에 갇혀 나랏일을 돌봐야 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는가?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하며 이런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을 것이다. 고려 말에 격구라는 놀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의 왕들은 격구를 자주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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