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규 한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장)
청소년정책의 바람직한 방향과 기조
□ 보호·복지·육성보다 지원이 중요
미래 청소년 정책은 과거와 같이 청소년들을 기존의 가치관과 제도적 틀 안에 안전하게 ‘보호’하거나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육성’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계발하고 역량을 강화하며, 관심과 취향에 따라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도전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와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또한 국제기준(global standards)에 부합하는 청소년 인권 보장을 제도화해 나감으로써, 글로벌 수준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 청소년 전문행정기구 설립 시급
장차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청소년정책을 국가정책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해방 직후 외교정책이 중요했고, 1950년대에는 농업정책, 1960년대 이후 경제정책, 1980년대 이후 정보화정책이 중요했지만, 이제 미래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인적자원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적자원 개발의 출발점은 바로 청소년정책이며, 정보사회, 고령사회의 활력도 청소년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청소년정책은 아직도 당당한 행정부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교육부, 내무부, 총리실, 체육부, 문화체육부, 문화관광부 등을 거쳐 2005년에 국가청소년위원회로 독립하였다가, 2008년에 다시 보건복지가족부를 거쳐 지금은 여성가족부 내 청소년정책실 담당으로 되어 있다.
2004년부터 미국의 백악관 라운드 테이블을 벤치마킹한 ‘청소년특별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선정된 다양한 계층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의제를 정해 토론하고,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형식이다. 청소년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돼 정책에 반영되며, 그만큼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첫해에만 참석했고, 총리 주재를 거쳐 지금은 장관주재 행사로 격하되었다.
지역화와 분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지역청소년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점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청소년 상과 역할도 변하고 있다.
21세기 국가발전과 미래창조를 위해서는 청소년의 잠재력과 역량계발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보호나 육성, 복지의 틀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미래지향적 청소년행정을 위해서는 청소년들과 친화성이 큰 대중문화, 스포츠, social media, voluntary association, 미래전략 등을 총괄하는 독립적인 부서(가칭 청소년미래부)를 신설해야 한다.
□ 미래창조 위해 제도 개혁해야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른 문명사적 전환기에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보통신 분야나 사이버 커뮤니티, 청소년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양식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세계 어떤 나라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다. 다수 성원들의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이 변하면 법과 사회제도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사회변동의 내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사회제도의 부적응현상이 나타나고, 구성원들은 뭔가 생활에 불편과 불만을 느끼게 된다. 원래 제도나 문화란 구성원들에게 공기처럼 편안한 것인데, 다수가 맞지 않다고 느껴 저항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사회에 대한 심리적 일체감의 정도가 약화되고 사회통합도 취약해진다.
최근 한국사회가 꼭 그러하다. ‘2040세대의 반란’에 따른 기성 정치권의 몰락, 왕따문제나 학교폭력 등 ‘학교붕괴’로 불리는 공교육의 위기, 고령화와 저출산 및 독신가족 증가에 따른 ‘가족해체’현상 등은 각각 정치제도, 교육제도, 가족제도의 심각한 부적응을 보여주는 신호들이다. 특히 수평적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에 익숙한 청소년 세대는 수직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위계질서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산업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한국은 빠른 속도로 서양의 선진국들을 따라 왔지만, 이제는 정보사회에 적합한 한국의 새로운 제도를 적극 모색해 나가야 할 때이다. 18세기 중엽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많은 혼란이 있었으나, 공장제도, 시장경제, 노동조합, 관료제, 학교교육, 대중언론, 대의민주주의 등을 고안해 내면서 산업사회를 꽃피웠던 것처럼, 이제 정보사회에 부응하는 제도화를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
21세기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제도를 요구하는, 산업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문명시대가 될 것이다. 21세기에 적합한 사회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사회제도란 인간생활의 전 영역을 포괄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제도의 내용을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미래 사회제도가 갖추어야 할 핵심적 특성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1세기의 사회제도는 보다 수평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정보사회에서는 전문직, 기술직, 행정관리직 및 사무직 종사자의 구성비가 계속 높아지면서 계급 간 차이나 성별 차이는 더 이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므로, 불평등에 기초한 사회제도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뿐더러 유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둘째, 21세기의 사회제도는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제수준이 향상되고 생활양식이 변함에 따라 여가생활 및 문화 향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일에 쫓기던 삶은 여가를 즐기는 삶의 양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는 자연생태학적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환경주의가 새로운 신념과 가치관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며, 모든 사회제도는 이러한 가치관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셋째, 21세기의 사회제도는 social media 등 함께 하는 상호작용방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산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자유경쟁을 통한 효율성의 제고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든 사회성원들이 중요한 전문적 기능을 담당하는 그물망 사회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협조하는 가운데서만 창의력이 발휘되고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 인간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데 대한 공감대가 모든 사회제도의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한다.
교육 청소년 잠재력 계발 여건 조성·지원 지향해야
세상이 바뀌었다. 사회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바뀌었다. 청소년은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호흡하는 세대이다. 청소년기는 기성세대를 따르기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며, 그 자체로서 삶의 소중한 시기이다. 청소년들도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며, 인간다운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청소년이 미래를 창조하는 시대적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은 미래 환경과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갈 세대이므로 과거의 사회 환경과 규범에 의해 ‘육성’될 수 없다. 청소년은 결코 기존 질서에 잘 순응하도록 길러야 할 육성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을 미래의 희망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인식의 틀부터 바꾸어야 하며, 그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기존의 산업사회 제도는 수직적 인간관계, 물질적 가치관, 배타적 경쟁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 개혁의 방향은 무엇보다도 수평적 인간관계, 비물질적 가치관, 공생적 소통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주요 사회제도들 중 경제제도는 변화의 와중에서 일부 부작용은 있지만 비교적 빠르게 새로운 틀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가족제도와 교육제도, 정치제도는 미래세대의 심한 부적응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제도는 가장 변화가 필요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구 시대의 두꺼운 껍질에 싸여 미래세대를 가장 견디기 어렵게 하고 있다. 올바른 교육은 기존의 문화와 지식을 청소년들에게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의력을 기르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지원하는 것이다. 국가 청소년정책의 방향이 기존의 ‘보호’ ‘육성’‘복지’의 틀에서 벗어나 ‘계발’ ‘지원’을 지향해야 하는 것과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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