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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월간 제7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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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골 통신 (26) 황악산 정상을 바라보며 |
- 본적도 도로 옮기고- 이 동 희 / 소설가
"차를 한 잔 하며 산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차가 없이 그저 바라보며
면산(面山) 대화를 하기도 한다."
직지사가 5대 사찰이라 하였다. 5대니 3대니 다 크다는 것인데 기준에 따라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하였다. 어떻든 큰 사찰이었다. 그 안에 대학이 있고 절 이름의 기차역이 있고 그 앞에 국제조각공원이 있고 한국 대표 시인들이 다 망라된 시비공원이 있다. 무엇보다 그 절의 천불전(千佛殿)에는 천의 얼굴을 한 부처를 연출해 놓았다. 하나하나의 모습이 다 다른 부처의 숲에 압도당하게 한다. 불교 또는 종교의 설치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이었다. 직지사(直指寺)라는 절 이름도 독특하다. 번번이 들어도 잊어버리지만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조사어록에 근거한 듯하다. 신라의 눌지왕 때 고구려의 아도(阿道)화상이 세웠다니까 대충 1600여년의 내력을 갖고 있다. 스님이 신라에 불도를 전하러 왔다가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좋은 절터라고 한데서 유래한다는 전설도 있고 나중에 이 절을 중건한 능여(能如)대사가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전해온다. 황악산 높이가 1111m인 것을 가지고 작대기 4개를 세로로 가지런히 세워 놓은 듯하다고 얘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직지사가 자리잡고 앉은 뒷산 황악산은 이쪽 매곡 그의 동네에서 보면 앞산이다. 건천산 천덕산의 능선이 합쳐진다. 이 골짜기 안에는 이보다 더 높은 산이 많다. 각호산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 등. 민주지산은 1242m이고 충북 경북 전북 귀퉁이인 삼도봉도 1176m이다.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 줄기이다. 산이 높기도 높지만 마을 앞을 떡 가리고 있고 경부선 철도역이 있는 황간(黃澗)은 이 황악산에서 흘러내려가는 시내라는 뜻으로 명명한 듯하다. 사실은 이 골짜기 물이 다 흘러가는 것이다. 황간에 있는 금상교는 금강 상류 다리라는 뜻이고, 황학산 자락 김천 직지사로 넘어가는 괘박령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라고 쓴 팻말이 있다.
뫼뿌리 악(岳)자 대신 학 학(鶴)자를 써서 황학산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 건너 황개울에는 가끔 황새라기도 하고 백로라기도 하고 큰 새가 날아 와서 나무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논가를 거닐기도 한다. 왜가리라 하기도 하고 두루미라 하기도 하고 정확한 새의 이름은 잘 모르겠고 학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 황악산 꼭대기를 보고 싶은데 그의 집이 마을 가운데라 앞집이 가리고 나무가 가려서 창문으로 그 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앞에 두 집 사이로 산이 보이는데 그의 집 늙은 호두나무와 앞집 감나무가 가려 잎이 다 떨어진 계절에나 볼 수 있었다. 그의 호두나무는 베어내면 되지만 남의 감나무는 어떡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한쪽만 2층을 올렸다. 그러느라고 아래 층 거실은 상당 부분 층층대가 차지해야 했다. 황악산 정상을 원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는 감수를 해야 했다. 2층 방의 소파에 앉으면 산 정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차를 한 잔 하며 산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차가 없이 그저 바라보며 면산(面山) 대화를 하기도 한다.
한 번은 서울 신림동 근처에서 집을 사러 다닌 적이 있다. 수없이 이사를 다닌 중의 하나였다. 다른 집을 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때는 그가 따라다니며 참견을 하였다. 관악산의 정상이 보이는 집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소개하는 사람에게 미리 그렇게 얘기하였다. 그런 집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관악산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정상이 아니고 옆 자락이기도 하고 또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마당에서 보이거나 옥상에 올라가야 보이는 것이었다. 겪어본 사람이면 알지만 집을 사려고 몇 번 따라다니다 보면 발이 아프고 기운이 다 빠진다. 퇴근을 하고 축 늘어진 몸으로도 그렇고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후에 여러 군데 따라다니다 보면 금방 지쳤다. 물론 돈이 많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의 형편에 맞추어야 하고 전세를 끼워야 하고 조건에 맞는 집은 한참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높은 지대에 있었다. 그래서 아예 집 안에서 창문으로 산의 정상이 보이어야 한다고 다짐을 받고 가지만 가보면 또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그런 집을 사지 못 하고 말았다.
그 후도 이사를 몇 번을 다녔는지 모른다. 제일 비싼 동네 제일 큰 아파트에 살기도 했다. 거기 14층에서 300여m 되는 대모산 정상을 코앞에 바라보고 살기도 하고 그러고도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책 모서리를 다 망가뜨렸다. 책들을 다 끌고 이리로 낙향을 하면서 호적등본 떼는 편리를 위하여 바꿔 놓았던 본적도 제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런 경력이 있는 터여서 그는 2층을 올리기로 한 것이고 산을 바라보며 혼자 대화를 하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였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후에 무슨 세계가 있는가. 천당이 있고 천국이 있는가. 극락이 있는가.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었다. 대답도 그가 하여야 했다.
“천국은 마음속에 있는 거야.”
“개똥밭에 살아도 이승이 낫지.”
그렇게들 말한다. 그 이상은 그도 모른다.
산을 바라다 보다 학이 내려앉는 것을 본다. 그것이 학이 아니고 왜가리라 하더라도 천년을 산다는 새를 떠 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느 날, 앞집 옥상에 곶감 타래를 짓느라고 황악산 정상은 2층 소파에서 창문으로는 볼 수가 없고 뒤 베란다로 나가서야 볼 수 있다. 커피 잔을 들고 나가서 산을 바라보다 들어온다. 정상-頂上, peak-은 아직 그에게 남은 욕망이다. 그것을 위해 귀향을 한 것이다. 아무것도 못 이루면 산꼭대기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리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알았어.”
남의 감나무를 벨 수 없는 것처럼 남의 시설물을 어쩔 수가 없다. 보이지 않아도 보는 마음의 눈을 가지면 된다. 천국이 마음속에 있듯이 산 너머에 있는 천불을 가 보지 않아도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극락이다.
기고만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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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비바람이 몹시 치는 날, 독립유공자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다. 영동읍 매천리 체육관 옆 광장에 정구복 영동군수 김원진 광복회 충북지부장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등 영동 독립유공자 쉰아홉 분을 추앙하기 위해 2억6000만원(보훈서 4500만원, 군비 2억500만원, 건립추진위원회 자담 1000만원)을 들여 6.7m 높이의 탑과 청동주물 인물상 등을 건립하였다. 글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사진 앞은 취지문을 쓴 필자(좌), 조성필 조각가(우), 정원용 영동문화원장과 유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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