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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월간 제7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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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인의 필독서]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
매일매일 치열하게 사는 바로 우리 이야기
어릴 때부터 시장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어른 중 누군가 시장에 간다면, 늘 따라나섰다. 좁은 시장통에 펼쳐진 풍경들은 어린 나로 하여금 들뜬 기분을 갖게 했다. 추석 같은 명절 대목이면 시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억척스럽게,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시장 사람들의 모습은 ‘명작’을 마주하는 것처럼 큰 감동을 주곤 했다.
하지만 요즘의 시장은 한적하고 지루하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느꼈던 펄떡이는 생동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 막 건져 올린 숭어처럼 펄펄 뛰는 인생들을 만나고 싶을 때, 양귀자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양귀자 지음, 살림 펴냄)을 꺼내 읽는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에는 치열한 삶이 있다. 때로는 외롭고, 가난하고, 폭력적이고, 옹졸하며 쓸쓸하기도 한 사람들의 생활이 뒤엉켜 쏟아내는 치열함이다. 흔히 ‘원미동 사람들’을 따뜻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식적인 낙관이나 안이한 휴머니즘은 없다. 삶의 비정과 남루를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면서도 약간은 젖은 눈으로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연작소설은 ‘멀고 아름다운 동네’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추운 겨울날, ‘은혜’네 가족은 이사를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사였다. 삼 년 전에 팔려고 내 놓았으나 보러오는 사람이 없어, 절대로 팔리지 않을 거라는 부동산업자의 말에 마음 놓고 전세 계약을 하고 이사한지 보름 만에 집이 팔려버렸다. 전셋집 구하는 일에 진력이 난 은혜 아빠와 엄마는 전셋돈으로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에 부천으로 간다. 그리고 계약서를 쓴다. 전세계약서가 아닌 매매계약서를. 은혜 아빠와 엄마는 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 화물차 짐칸에 실려서 부천시 원미동의 ‘무궁화연립 3층’으로 이사를 간다. 책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방이 그들을 내 쫓는 때도 있고 그들이 방을 버리고 떠난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방이 그들을 내몰았다. 그렇게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얻은 결론은 한 가지, 집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그 희망을 갖기 위해 서울에서 떠나게 되었다.”
트럭 짐칸에서 지독한 추위에 시달리며 은혜 아빠는 뭔가 기이했다. 희망이라고 여기던 집을 갖게 되었지만, 어쩐지 부천의 집은 서울의 집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 이런 순간에 그 따위 케케묵은 기억을 꺼내놓다니. 가나안에서 무릉도원까지. 그 멀고 먼 길을 달려오면서, 그것도 트럭의 짐칸에 실려 여기까지 오면서 아내는 기어이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어 놓기는 한 모양이었다.”
원미동에 옹기종기 모여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 중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 인물은 ‘마지막 땅’에 등장하는 ‘강노인’이다. 원미동 토박이인 그는 칠순을 앞둔 나이지만 건장하고 농민다운 외모를 지녔다. 그에게 땅은 농사를 위해 있는 거지만 그의 농사는 순탄치 않다. 그가 푸성귀를 가꾸고 있는 땅이 시가 몇 억 원이나 되기 때문이다. 원미동 23통 주민들은 강노인이 땅에 거름을 내는 봄이면, 냄새가 난다며 원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 땅에 농사짓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하루 빨리 땅이 팔려,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야 집값이 오를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강노인은 땅을 돈의 잣대로 바라보는 사람들, 즉 ‘서울 것들’과 세상에게 맞서 땅을 지켜내려 한다. 하지만 마지막 땅을 지키고자 애쓰던 강노인은 큰아들 용규에게 빚을 준 사람들의 빚 독촉에 그 땅을 팔게 된다.
원미동 사람들의 생활 터전은 어떤 모양새일까? ‘찻집 여자’ 중 일부를 옮겨 본다.
“원미동 23통의 모양새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흡사 장터 객줏집의 국자와 같은 꼴이었다. 국자의 손잡이 부분에 원미지물포, 그의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강남부동산, 우리정육점, 서울미용실 등이 한켠으로 촘촘히 박혀 있고 맞은편에는 강노인이 푸성귀를 일궈먹는 밭과 무궁화연립, 그리고 김반장의 형제슈퍼가 자리잡고 있었다.”
관찰자로서 원미동 사람들을 지켜보는 내가 등장하는 작품은 ‘한계령’이다. 한계령, 그 험하고 가파른 고갯길은 어쩌면 원미동 사람들이 넘어야할 삶의 고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작가는 그 한계령에서 ‘좋은 나라’를 이끌어낸다.
작고도 큰 세계 원미동, 그 거리를 걸어보자. 뒷짐을 지고, 느리게, 그리고 간혹 발길을 멈춰도 보자. 그러는 사이 막막한 어둠을 밝히는 빛줄기와 만날 수 있다. 희망이라는 친구를 마음에 품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양귀자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은 슬픔이 기쁨에게 다가가는 작품이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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