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1 월간 제741호>
[4-H인의 필독서] 박완서 ‘굴비 한 번 쳐다보고’

음식 ‘맛’을 알아야 인생 ‘맛’도 제대로 알 수 있다

들길을 걷는 일은 즐겁다. 터덕터덕 생각 없이 걷다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냉이의 초록 얼굴을 만나면 반가운 친구 본 듯 설렌다.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서 생명을 이어온 냉이. 땅 속 깊이 뿌리 내린 냉이를 캐면 향기로움이 멀리 퍼져나간다. 그 사이, 봄을 느낀다.
새봄에는 냉이된장국을 먹어줘야 한다. 보글보글 끓여낸 냉이된장국. 그 맛으로 기운을 차려 봄을 맞아야 하는데, 들녁에서 냉이 한 뿌리 만나지 못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꽁꽁 숨어있는 모양이다.
오늘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맛’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고른 책이 그림책 ‘굴비 한 번 쳐다보고’(박완서 지음, 이종균 그림, 가교출판 펴냄)다.
‘굴비 한 번 쳐다보고’라는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이 책은 자린고비의 삶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반찬값이 아까워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술 뜰 때마다 딱 한 번씩만 굴비를 쳐다보게 했다는 옛 이야기의 주인공 자린고비를 박완서 선생은 새로운 버전인 고린재비 아들 삼 형제로 탄생시켰다.
한창 자라는 중인 고린재비의 세 아들은 아버지에게 늘 배가 고프다고 했다. 돈 아낄 궁리를 하던 고린재비는 반찬에는 돈을 들이지 않기로 한다. 그리하여 장에서 가장 짜게 절여놓은 굴비를 한 마리 사 온다. 그 굴비를 천장에 매달고 이렇게 외치게 한다.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
굴비 한 점만 맛보고 싶다는 아이들을 야단치고 달래가길 여러 날, 고린재비네 삼형제는 어느새 굴비만 보면 입에 침이 고여 밥을 잘 먹게 된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고린재비는 세상을 떠난다. 반찬값을 아낀 고린재비는 아들들에게 좋은 논과 밭을 남겼다. 삼형제는 이제 먹고 싶은 걸 뭐든지 사먹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먹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계속 밥만 먹고 살았다.
고린재비의 큰아들은 농사를 지었다. 쌀과 곡식은 물론 채소와 과일까지 풍성하게 거둬들였지만 농작물이 팔리지 않았다. 팔리지 않는데서 그치지 않고 이상한 소문까지 퍼져나갔다. 바로 이런 소문이었다.
“겉보기만 번드르르하고 정작 맛도 없는 걸 뭐라는 줄 아나? 그런 걸 개살구라고 하지. 저 집 건 뭐든지 다 개살구라네. 쌀도 잡곡도 오이도 호박도 참외도 수박도 겉보기엔 탐스럽고 먹음직스럽네만 먹어 보면 정작 맛이 빠져 있으니 이런 허망할 데가 있겠나.”
고향을 떠난 둘째는 좋은 스승을 만나 최고의 소리꾼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어릴 적, 굴비 한 번 쳐다보고 밥 한 숟갈 먹기에 길들여질 때 가장 많이 울고 보챘기 때문에 목청이 트여 노래를 잘 불렀다. 큰 잔치가 있어 놀이판을 차리고 명창들을 부르자 스승은 둘째를 그곳에 내보냈다. 그런데 둘째가 노래를 부르자 잔치판의 흥이 깨져버렸다.
“스승은 그제야 제자의 소리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그건 기쁨과 슬픔, 노여움과 즐거움을 갖춘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텅 빈 병의 주둥이에 입김을 불어넣어서 나는 소리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둘째는 소리꾼이 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셋째도 고향을 떠났다. 굴비 한 번 쳐다보고 밥 한 숟갈 먹기에 길들여질 때 셋째는 뚫어져라 굴비를 관찰했고 모든 것을 실물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셋째 역시 좋은 그림 스승을 만났다. 셋째의 그림 솜씨를 사랑한 스승은 셋째에게 의뢰받은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셋째가 그린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물론이고 초상화의 주인 역시 크게 실망했다.
“이 얼빠진 얼굴이 어떻게 산 사람의 얼굴이랄 수가 있느냐? 이목구비가 좀 삐뚜로 박히든지, 하다못해 하나쯤 빠지더라도 얼은 바로 박혀야 산 사람의 얼굴이랄 수가 있지.”
셋째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실패한 삼형제가 한 자리에 모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그랬다. 바로 맛이 문제였다. 음식의 맛을 모르는 삼형제는 인생의 맛도 느낄 수 없었던 거다. 음식의 단맛은 물론이고 짜고 시고 맵고 쓴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인생의 맛도 제대로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박완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주기다.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참된 열매를 가꾸어 가라고, 마음 가난한 우리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것 같다. 오늘의 책 ‘굴비 한 번 쳐다보고’는 인생의 맛에 지친 어른과 세상의 맛을 배워가는 아이가 나란히 앉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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