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1 월간 제734호>
매화골 통신 (18) 무슨 말이 필요한가

- 어떤 위령제에서 -    이동희 / 소설가

"최고로 더운 날 최고로 더운 시간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농촌 마을에는 정이 넘치고 낭만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고 처참한 이야기도 많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지만 참 웃지 못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쌓여 있다.
이 마을 매곡 노천리로 말할 것 같으면 빨치산들이 들끓던 상촌 물한리 삼도봉으로 가는 길목이다. 6.25전쟁 이후 공비토벌을 하기 위해 군경이 마을 앞 신작로로 무수히 들락거렸다. 마치 무기 전시회를 하듯이 탱크 장갑차가 있는 대로 다 올라가고 또 내려왔다. 이 길로 피란을 가고 또 돌아왔다. 피란도 한 두 번이며 어디 피란뿐인가.
그 이전의 얘기였다. 보도연맹사건은, 좀 색다른 아니 너무 끔찍한 이야기다.
지난 7월 5일 상촌 상도대리 선화티 골짜기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유족들 과 군의 인사들 국회의원 학자들 음악(국악)인 무용가 작가 등 많은 저명 무명 인사들이 검은 양복을 입거나 소복을 입고 진행자들이 달아주는 검은 리본을 차고 있었다.
장마 끝에 불볕이 내리 쬐고 있는 오후 2시 최고로 더운 날 최고로 더운 시간이었다.
볕을 가리기 위해 쳐 놓은 두 세 개의 천막이 있지만 뒤의 나무 그늘만 못하여 검은 정장을 한 사람들은 식이 시작될 때까지 나무 밑에서 나눠준 책자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 골짜기 아니 이 마을에 이렇게 많은 인사들이 모인 적이 없었다. 6.25전쟁 때 그러니까 1950년 7월 20일 전후에 영동경찰서 경찰에게 인계된 보도연맹원들이 군트럭을 타고 이 골짜기 숯가마에서 총살시킨 지 61년 만에 처음으로 위령제를 올리는 것이다.
영동의 어서실에서 이런 위령제를 올린 적이 있고 그도 거기에 갔었다. 충북지역 또는 전국 각 지역에서 유해 발굴 조사보고 등이 이루어지고 몇 년 전부터 위령제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적어놓은 표지판 앞 비탈에 제단을 마련하였다. 검은 판에 흰 글씨로 희생자 805명의 이름을 써놓은 대형 위패를 세워놓고 그 앞에 제물을 차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는데 저 아래 차가 닿는 데까지 실어다 놓은 것을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 올려다가 차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돼지머리 전에다 나물에다 과일 술 등 제물을 다 진설하고 시작된 식은 상당히 늦었다.
식전에 대금 연주를 하였고 전통제례를 올렸다. 초헌 아헌 종헌 그리고 유족들이 전부 나와 위패 앞에 엎드려 절을 두 번씩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황룡사 주지 종림스님의 종교의례가 있었고 희생자에 대한 묵념이 있어 참석자는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먼저 장경섭 유족회장이 나와, 그동안 굴전된 역사 속에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와 억압 속에서 신음해온 우리 유족들은 이 위령제로 하여금 가신 님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저승에서나마 위안이 되시길 바라며 이승에 남아 있는 유족들에게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와 햇빛 속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인사말을 하였다.
사회자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은 경과보고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보호하고 대피시키기 보다는 처형하였다. 그 명분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과 적을 도와 정부를 공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고, 이는 막연한 추측에 의한 일종의 ‘예방학살’로 법치주의 국가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반문명적 반인권적 범죄행위였다고 하였다.
영동군에서 제일 먼저 처형한 곳이 여기였다. 현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 상도대리 고자리에서의 학살은 보도연맹원만이 아니고 경찰에서 예비 검속된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7월 초순 경부터 7월 30일까지 시기를 달리 하며 여기 상도대리 선화티 명박골 잿골 고자리 산제당골 영동의 어서실 석쟁이재 등 3개 지역 6개 지점에서 정부와 치안국 충북도경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 영동분견대 영동경찰서 경찰과 군인들이 처형한 것이다. 처형이란 형을 집행하는 것인데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지난 6월 30일 대법원이 울산보도연맹사건에 대해 전쟁범죄 소멸시효를 진실규명 시점부터 적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실체적 진실에 한 발짝 나아가는 역사적 심판이었다.
국회의원과 영동군수 의회의원의 추모사 그리고 추모시 추모공연이 끝나고 뒤풀이로 이어졌다.
음복을 한 제물도 있었지만 유족들이 즉석에서 전을 붙이고 양념을 해 온 고기를 구은 안주에다 벌컥벌컥 막걸리를 마시면서 경건하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유족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동안 살아온 것이 생지옥이었다고 말하였다. 도대체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하였다. 그도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막걸리를 한 잔 받아들고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양강면 죽촌리 한 마을에 오월성과 이월성이 살았는데 경찰이 와서 이월성을 찾고 있었다. 보도연맹원 최후 소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월성이 가만히 있었으면 되는 것인데 자기는 오월성이라고 하여 헷갈린 경찰이 데리고 갔고 그것이 저승길이 되었다.
이미 70이 넘은 아들 오운영씨의 말이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참으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성을 똑바로 대며 내가 아니라고 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 가정법이 61년이 지난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매곡면 수원리 안병민은 7월 5일 연행되어 3일간 매곡지서에 구금되었다가 7월 8일 영동경찰서로 이송되었다. 84세 피해자의 처 정분화씨는 영동경찰서로 면회를 갔으나 남편은 거기 없었다. 돌아오는 길 매곡 신작로에서 보도연맹원을 태운 트럭 2, 3대가 상촌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트럭 네 귀퉁이에 경찰들이 있었고 그 안에 보도연맹원들이 머리를 숙인 채로 있었다.
증언을 청취 기록한 박 위원장이 말하였다. 80여명이 여기서 희생되었다고도 하였다.
소설가이며 영동문협 회장인 민영이 씨도 유족이었다. 리본을 달아주며 진행을 맡고 있었다.
“막걸리나 드세요. 그런 얘기 다 할려면 소설이 몇 권이 될지 몰라요.”
그녀는 소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아버지 그리고 홀로 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컵의 막걸리를 마셨다. 술이 썼다.

지난 7월 5일 상촌 고자리 선화티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영동군 합동위령제가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열렸다. 불볕이 내리쬐는 오후 장경섭 유족회 회장을 비롯한 유족 56명과 많은 인사들이 검은 정장을 하고 참석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였다. 위패와 제물 앞에서의 진혼무(鎭魂舞, 조희열). 무슨 말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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