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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1 월간 제73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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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골 통신 (17) 끈적한 정이 숨쉬는 농촌 마을 |
-매실을 따고- 이동희 / 소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농촌 마을엔 아직 뚝뚝 흐르는 정이 있다."
매실을 땄다. 한 7, 80㎏ 될까, 내외가 이틀을 두고 땄다.
텃밭에 10여 그루 집안 여기 저기 대여섯 그루 심은 것이 2, 3년 전부터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여 작년에는 꽤 많이 땄다.
금년에는 수확이 좋지 않았다. 지난 겨울 너무 추웠고 봄 가뭄이 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농약을 안 쳐서 그런지 때깔이 안 좋고 허실이 많았다. 작년의 반도 안 되었다. 나무 가지도 더러 허옇게 지실이 들고 이파리도 꺼먼 점이 잔뜩 덮여 있었다. 농약은 한 방울도 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고집하여 왔는데 이러다 다 큰 나무가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었다. 나무뿐 아니라 바닥에 무섭게 자라는 풀도 힘 자라는 대로 뽑을 뿐 제초제는 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기농인 것이다.
매화나무와 매실나무를 아직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지만 눈이 녹은 이른 봄에 아직 아무 꽃도 피지 않은 때에 온 집안을 환하게 해 준다. 푸른 빛을 띠며 흰 것은 청매실이고 분홍은 홍매실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을 보면 됐지 열매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인지 모른다.
가시가 있고 손이 자라가지 않는 것은 따기가 쉽지 않았다. 팔뚝과 얼굴이 긁히고 찔리고, 높은 가지에 달린 매실은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 따야 한다. 끝까지에 한 두 알 달린 것까지 따기 위해서는 곡예를 해야 한다. 품을 살 경우 다른 밭일을 하는 것보다 많이 주어야 한다.
요즘 사다리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가볍고 발이 하나 더 있어 높이 바쳐놓고 올라가 설 수 있다. 농가에는 필요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다 갖추려면 한이 없다. 그래서 마소를 기르는 집은 입찬 말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될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와 물을 뿌리기 위한 긴 호스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려다 쓴다. 그 집에서는 우리 조로를 갖다 쓴다.
매실을 따서 좀 나눠 주었다. 우체국에 가서 조그만 박스를 몇 개 사왔다. 4, 5㎏ 들어가는 박스값이 420원 송료는 3000여원 하였다. 이 마을에는 하루 한 번 오후 4시에 우편차가 온다. 그 시간을 놓치면 영동으로 들고 나가든가 내일 붙여야 한다. 별 것은 아니지만 농약을 치지 않은 것이며 방금 딴 것이다. 갈색 설탕을 1:1로 재고 100일 동안 두면 매실청이 된다. 물에 타서 마시면 몸에 좋은 음료가 되는 원액이다. 남은 알맹이에 술을 부으면 매실주가 되고 장아찌를 담기도 한다.
이웃에도 몇 집 매실 나무가 없는 집에 주었다. 주면 그냥 또 있지를 않는다. 앞집에서는 담 넘으로 불러 뭘 받으라고 한다. 뭐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사양을 해도 안 되었다. 꼭 매실을 준 것 때문이 아니고 정으로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처럼 들기름이라고 쓴 병에 기름이 끈적하게 발려 있었다. 옆집에서는 설탕을 좀 사 주겠다고 하는 것을 극구 사양하였더니 해질 무렵에 무엇을 가지고 왔다. 그가 나머지 매실을 따다가 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올뱅이었다. 앞 냇물에서 잡아왔다는 것이다. 올갱이라기도 하고 파리올뱅이라기도 하는 것으로 자잘한 민물 다슬기다. 큰 남비에 반은 넘었다.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올갱이를 해가 지도록 미끄러운 물 속에서 엎드려 잡은 것이다.
“아니 이것을 다 직접 잡으신 거라요?”
눈물이 나왔다.
옆집 할머니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아내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먹어는 봤는데…”
해 먹는 방법은 몰랐다.
물에 담갔다가 혀를 내밀고 있을 때 삶아서 속을 빼내고 그 껍질을 삶은 국물에 배추나 아욱 정구지(부추)를 넣고 된장국을 끓인다. 물론 올갱이 속알맹이도 같이 넣는다. 그것이 올갱이국 올뱅이국, 이 지역의 특미이다. 뒷집 할머니가 배추를 준 것이 있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이 마을 뿐 아니고 농촌 마을엔 아직 뚝뚝 흐르는 정이 있다.
농번기가 오기 전 연례행사로 치르는 초등학교 동문 체육대회가 6월 12일 일요일에 있었다. 다 이 매곡 초등학교 출신이므로 면민 체육대회가 되었다. 전날 저녁 전야제부터 온 마을이 다 들리게 확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도 부르고 축제를 벌였다. 냉장고 TV 자전거 등 경품도 푸짐하였다.
점심은 국수였고 떡에 고기에 과일에 술이 지천이었다. 동기별로 천막으로 해를 가리고 주안상을 차려 놓고 흥청거렸다. 체육대회라고 하지만 노래가 주를 이루었고 남녀 동기별로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나던 해 졸업한 그의 동기는 두 반이었는데 반은 죽었고 20여 명이 모였다. 서울서 봉고차로 한 차 오기도 했다. 그런데 금년이 졸업한 지 61년이 되니 회갑이 아니냐고 했다. 따지고 보면 만 60년이 회갑이므로 진갑인 것이다. 모두 한바탕 웃으며 그러면 잔치를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였고 동기인 박연근 전 동창회장이 저녁을 샀다. 하루 종일 술을 마셨지만 그래도 한 잔 더 했다.
“위하여!”
모두들 잔을 들고-빈 잔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건배를 하였다.
“아니 뭘 위하여가 있어야지.”
누가 웃자고 한마디 한다.
“살아 있는 것을 위하여”
그가 말하였다. 살아 있으므로 만나는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었다.
“회갑 잔치면은 노래가 있어야 할 것 아녀?”
그가 다시 말하였다. 그리고나서 일어났다.
“타향 살이 몇 해던가 손 꼽아 헤어보니……”
그가 돼지 목 따는 소리를 하고 노래를 잘 하는 정순실에게 지명을 하였다. 순실은 면서기로 재직하였던 아버지가 작사 작곡했다는 노천리가를 불러 같이 합창을 하였다.
뒷동산은 높이 솟아 뒤를 가리고/앞 시내는 맑게 흘러 금강에 가네/평야는 넓이 뻗혀 논밭이 되고/한가하고 평화로운 우리 노천리//산에서는 여러 가지 재목이 나고/들에서는 여러 가지 곡식이 나네/부지런히 일을 하여 장래 준비에/우리들도 이렇다는 자랑하려네
다음은 유재우를 지명하였다. 동기회 회장이다. 한 참 빼다가, 오늘도 걷는다마는……을 불렀다. 계속 노래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온 여자 동문들이 길이 막힌다고 깝치었기 때문이다.
내년에 이만큼 다시 모일까 모르겠다.
“건강해야.”
“그래야. 건강이 제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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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 열리는 초등학교 동창체육대회는 면민 체육대회였다. 모두 그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다. 1950년 6·25 나던 해 졸업을 한 그의 동기는 전쟁 등으로 반은 죽고 20여 명이 모였다. 서울서도 봉고차로 한 차 왔는데 금년이 회갑을 맞는 해라고 누가 말하여 한 바탕 웃었고 기념으로 학교 현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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