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년(숙종 21년) 4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는 낙타에 짐을 싣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는 의주에 낙타를 두었다가, 서울에 가서 임무를 마치면 청나라로 돌아갈 때 다시 데려갔다.
1695년에도 청나라 사신은 낙타 한 마리를 몰고 왔다. 그리고 서울에서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의주에 들렀다. 사신은 낙타를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낙타가 왜 이렇게 말랐지? 병이라도 들었나?”
낙타를 돌보던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낙타는 사막에 사는 동물이잖아요. 조선에 와서 환경이 바뀐 탓인지 먹이를 도통 먹지 않더라고요.”
야윈 낙타 두고 가
“으음, 먹이를 먹지 못해 저렇게 바싹 야위었구나. 저런 몸으로 어떻게 우리나라까지 먼 길을 가지?”
사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낙타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비실비실한 낙타를 데리고 떠나 봐야 중도에 죽을 게 뻔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두고 가는 것이 낫겠다.”
사신은 이렇게 말하며 낙타를 조선에 버려두고 떠났다.
그 무렵 대궐에서 일하는 노비가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 출장을 왔다가 낙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간 낙타가 의주에 있다고? 낙타는 먼 나라에서 산다는 기이한 동물인데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구경 좀 해야겠다.’
노비는 의주로 달려가 수소문하여 낙타를 찾아냈다.
‘낙타가 참 특이하게 생겼구나. 이런 동물을 나 혼자 구경할 수는 없지.’
노비는 낙타를 데리고 있는 사람에게 값을 치르고 낙타를 샀다. 그리고 낙타를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거리에 낙타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낙타를 구경하려고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하하, 등에 봉우리가 솟았네. 덩치 큰 녀석이 혀를 쏙 내미는 꼴 좀 봐. 아유, 우스워라.”
“우스꽝스럽게 생겼어도 하는 짓이 귀여운걸.”
대궐에 들어간 낙타
숙종은 낙타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 대궐로 낙타를 끌어오도록 했다.
얼마 뒤 대궐에 낙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은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전하, 대궐에서 낙타를 기르시면 안 됩니다. 대궐에서는 기이한 동물을 기르지 않는 법입니다….”
숙종은 낙타를 대궐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니 어쩔 수 없이 낙타를 대궐에서 내보내야 했다.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간 낙타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낙타 죽자 관리 벌 받아
하지만 이전에 대궐에서 낙타를 기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17년(광해군 9년) 4월 23일, 요동의 명나라 장수 구탄이 낙타를 보내왔는데, 광해군은 이 낙타를 대궐에서 길렀다. 그런데 그해를 넘기기도 전에 낙타가 죽어 버려 사육을 맡은 관리를 벌주었다고 한다.
조선 제9대 성종은 1486년(성종 17년) 9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에게 낙타를 사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갈 수 있으니, 전쟁 때 낙타를 이용해 양식을 나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헌부 대사헌 이경동이 반대하는 바람에 그 일은 취소되었다.
이경동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생하는데, 흑마포 60필이라는 비싼 값으로 진기한 동물을 사오는 것은 큰 낭비라고 반대했던 것이다.
낙타는 지금도 동물원에 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이다.
어린이들은 낙타타기 체험도 하고 있다.
당시 낙타가 우리나라에서 잘 적응해 많이 번식되었다면 우리의 운송수단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까?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고려 태조 때도 낙타를 들여왔다가 굶겨 죽인 적이 있었다면서요?”
고려 초에 거란은 사신을 보내 낙타 54마리를 바쳤다. 고려와 정식으로 교류를 하고 싶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태조는 사신을 섬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거란은 신의가 없는 무례한 나라다. 발해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발해를 멸망시키지 않았는가. 이런 나라와는 교역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간사한 계책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태조는 낙타들도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다. 낙타들은 개경의 만부교 다리 밑에 매어 두라고 하여 모조리 굶어 죽게 한 것이다.
결국 이 일을 구실로 거란은 군사를 일으켜 고려로 쳐들어오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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