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1 월간 제731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최초 여학교, 남자 선생 칠판만 보고 가르치다

1886년 미국인 스크랜턴 부인이 선교사인 아들을 따라 조선에 왔다. 그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조선에 어떤 학교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1885년에 2명의 학생으로 문을 연 배재학당 말고는 이렇다 할 학교가 없었다.
‘조선 땅에 학교를 세우자. 여학생들만 가르치는 여학교를 만드는 거야. 내가 사는 집이 비록 좁지만 여섯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어.’

집에 여학교 열기로 결심

스크랜턴 부인은 여러 날을 밤새워 생각한 끝에 자기 집에 학교를 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다니며 학교에 학생들을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남존여비의 유교적 관념이 뿌리 깊어, 여자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바깥나들이를 할 때는 가마를 타거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 여자가 가르치는 학교라니,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선뜻 학교에 보내 주겠는가? 일 년이 지나도 찾아오는 학생 한 명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크랜턴 부인의 학교에 드디어 신입생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높은 벼슬아치의 첩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온 것이다. 명성왕후가 영어 통역을 할 부인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뒷날 자기가 그 일을 하고 싶어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랜턴 부인은 1명의 학생으로 학교 문을 열었는데,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다.
이화학당에는 뒤이어 또 신입생이 들어왔다. 끼닛거리가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집의 어린 딸이었다. 학교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한다니까 할 수 없이 맡긴 것이다.
세 번째 학생은 스크랜턴 부인이 수구문 밖에 나가 주워 왔다. 그때는 콜레라에 걸리면 수구문 밖에 내다 버렸기에, 죽어가는 병든 소녀를 데려와 치료해 주고 학생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아이들을 힘들게 모아서 학교를 열었기에, 스크랜턴 부인은 학생의 집에 곡식을 보내 주는 등 부모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학생들은 이름조차 없었다. 그래서 스크랜턴 부인은 처음에 이들을 ‘퍼스트’, ‘세컨드’, ‘서드’라고 부르다가 학생이 늘어나자 ‘수잔나’, ‘라이나’ 등의 세례명을 지어 주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처음에 한문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한문도 가르치지 않으니 그게 어디 학교야? 서양 오랑캐의 학교는 역시 어쩔 수 없군.”
그래서 결국 이화학당에서는 한문을 가르치기로 했다. 하지만 한문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밖에 구할 수 없어 고민이었다. 당시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해서 일곱 살만 되어도 남자 여자가 한 자리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크랜턴 부인은 생각다 못해 환갑이 넘은 남자 노인을 한문 선생님으로 임명했다.

남자선생 헛기침 신호로 수업해

한문 수업은 어떻게 진행했냐면 선생님이 헛기침으로 학생들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학생들의 얼굴은 보지 않고 칠판만을 보며 가르쳤다. 수업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면 그전에 선생님은 복도에서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학생들은 선생님이 오신 줄 알고 모두들 일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선생님이 또 헛기침을 하면 수업이 시작되고, 학생들은 정면을 바라보지만 선생님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칠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학생들이 일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선생님은 그 사이에 교실에서 나갔다.
어떤 학교에서는 남자 선생님과 여학생들 사이에 칸막이를 하거나 휘장을 치고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헛기침으로 하는 수업이 한결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이화학당 졸업하면 선교사가 학생을 서양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면서요?”

 이화학당은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여서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학교 문을 막 열었을 때는, 이 학교를 졸업하면 선교사가 학생을 서양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듣고 이화학당 두 번째 학생 엄마가 달려와 딸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스크랜턴 부인은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턴은 조선인 박씨와 다음과 같이 서약함. 스크랜턴은 박씨의 딸을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박씨의 허락 없이는 서양은 물론 조선 땅 어디라도 10리 밖으로 데려가지 않을 것임. 이를 어겼을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달게 받기로 약속함”이라고 서약서를 써 주어 박씨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1888년에는 서울 장안에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이 몇 건 발생했는데, 서양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가 아이를 잡아먹는 식인종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듣고 군중들이 몰려와 이화학당을 기습했는데, 조선인 수위들은 학생들을 보호하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아 사건과 관련된 소문은 헛소문으로 밝혀져 그 뒤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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