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1 월간 제730호>
매화골 통신 ⑭ 봄의 기지개

-마을 산행과 3·1절 행사-    이동희 / 소설가

"3·1절 행사는 이 마을이 중심이었다.
가장 극렬하게 기미만세운동을 했고
애국지사 숭모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기지개나 켜듯 함께 산행을 한다. 마을 소유의 산을 한 번 둘러보기 위해 같이 가는 것이다.
번지로는 황간면 서송원리 산 41, 43-1, 47의 63만9013㎡ 6정2단8묘의 임야, 마을 공동 소유의 산이다. 집집마다 쌀 2되씩을 거출하여 공동연료채취림으로 매입한 것인데 엉뚱한 사람 명의로 되어 있어 되찾은 것이다. 이 마을 강춘식 대표의 집요한 노력과 혈기로 쟁취한 것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그 공적을 기록한 열성비가 오석으로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산이라고 해야 세금만 나오지 별 수익은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뭐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을의 산이 생기고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릴 뻔 하였다가 다시 찾은 것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49번 도로로 상촌 쪽으로 가다가 수원리를 지나서 영동으로 가는 고개(시누재) 넘어에서 올라가면 되는 곳에 위치한 산이었다. 신탄리 가기 전에 황간 소계리 방향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이다. 제일 높은 곳이 석지양지이다. 그 정상에 오르면 황간 추풍령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6·25 한국전쟁 때 거기에 박격포를 황간철교 부근 강변으로 쏘아대었던 요충지다. 어느 쪽인지 아마 국군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포를 설치한 구덩이 여러 곳이 지금도 있다.
거기에는 또 그의 집안 묘가 있어 교대로 벌초를 하러 가는 곳이다. 솔직히 성묘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상당히 외지다고 할까 험한 산골짜기이다.
시누재 너머 과수원이 있고 언젠가부터 거기 산 밑에 외딴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진입로를 조금 떼어서 팔라고 하였지만 그럴 수는 없고 임대를 해 주었다.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정상 그렇게 한 것이다.
집을 조립식으로 잘 지었다.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앞이고 뒤고 온 산이 전부 마당이고 뒤란이었다. 그럴 일이 별로 없었지만 산도 지켜주었다. 난방도 기름으로 하니까 나무도 해 땔 것이 없고. 그런데 그 집이 거점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중행사로 산을 한 번 둘러볼 때 모이기도 이 집에서 하였다.
금년은 지난 2월 28일로 날을 잡았다. 오전 10시에 그 집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대개 이때 아직 농사일은 시작이 안 되었고 집이나 마을회관에서 뒹굴뒹굴하고 겨우내 놀던 끝이라 심심하고 뭐가 궁금하고 온 몸이 근질근질한 때이다. 바쁜 때 같으면 이런 인원들이 모일 수가 없었다. 상 중 하리 이장들, 전 이장들, 마을 대표들 말꽤나 하고 방귀꽤나 뀌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삼삼오오 승용차를 같이 타고 시간이 되자 일제히 몰려왔다. 화물차를 끌고 혼자 오기도 하고 봉고차에 두 세 명이 타고 오기도 하고 차들도 여러 대 동원되었다. 시골 사람들도 여기 3, 4키로 되는 거리를 다 타고 온 것이다. 차가 있으니 이리 저리 묻어온 것이다.
집이 넓었다. 큼지막한 소파에 넓은 탁자도 있고, 주인이 썼는지 이름난 글귀를 여러 점 걸어 놓았고 화분 석부작이 많이 있었다. 부인이 차를 한 잔씩 내왔다. 커피에다 무슨 약재의 차가 두 가지 있었는데 종이컵에 담아 여러 번 날라야 했다. 대부분 커피를 달라고 하였다.
올 사람이 다 온 것 같아 회의를 시작하였다. 이종수 대동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육기영 총무가 경과를 얘기하였다. 물을 낙차를 두어 계단식으로 내려오게 하는 사방공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군에서 추진하는 것이고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 이미 얘기해 아는 대로 승낙을 했다고 하며 지금 측량이 끝나고 해동이 되면 공사를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가서 그 현장을 한 번 둘러보고 의견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 질문을 받아가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머리가 허연 이 집 주인 남자가 과일을 깎아서 여러 접시 썰어 가지고 왔다. 배와 사과였다. 산 주인인 마을 사람들은 과일을 두 쪽 세 쪽씩 먹으며 왜 이런 걱정을 하느냐고 한 마디씩 하였다.
얘기를 대략 마치고 밖으로 나와 신탄리 쪽으로 조금 이동하였다. 석지양지 올라가는 골짜기 어귀에 차들을 세워놓고 산자락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가자 공사 예정지가 되었다. 거기에 군에서 나온 직원이 기사들과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연락이 된 것이다.
도면을 보면서 눈이 녹아 졸졸 흐르는 골짜기 여기저기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공정을 설명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할 뿐이었다. 공사를 하여 산에 해가 가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득이 되는 것도 없었다. 사방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니까 협조하는 것이고 그들 모두가 산주이니 같이 입회를 한 것이다.
브리핑을 듣고 산을 조금 오르다가 내려오는 길에 그가 메기를 잡았다. 멀쩡한 곳에 발이 빠지고 양말이 다 젖은 것이다.
“역시 표가 나는구만!”
면 산업계에 있던 친구 내곤이 얘기하자 모두들 보고 웃었다.
“할 말 없네.”
그러나 견딜만 했다. 역시 봄이었다.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모양이 그래서 그렇지 산골물은 차지 않았다.
다시 차를 타고 황간으로 나가 순대국에 소주를 한 잔씩 하는 것으로 화기를 돋구었다. 점심은 회장이 쏘았다.
이튿날 3월1일은 3·1절로서 마을에서 기념행사를 하였다. 기념행사는 어디나 있지만 이 마을은 좀 특이하다.
면 중에서도 제일 작다고 할까 인구가 자꾸 줄어들어 옆 황간 면과 합칠 위기에 있는데 3·1절 행사는 여기 매곡초등학교 강당인 매곡관에서 하여 군수, 교육장, 경찰서장, 문화원장이 다 참석하였다. 3·1절 행사는 이 마을이 중심이었다. 여기서 가장 극렬하게 기미만세운동을 하였고 그 때 감옥에 가고 허리가 부러지고 한 사람들에 대한 건국훈장·애족장·대통령 표창 등 열 한 분의 애국지사에 대한 숭모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금년은 구제역으로 3·1절 기념식은 취소가 되고 숭모비 앞에서 추앙제례를 지내기로 하였는데 또 비가 와서 매곡관 실내에서 행하였다. 초헌관은 정구복 영동군수, 아헌관은 정창용 군의회의장, 종헌관은 이문세 유족대표이다. 집례는 황간 향교, 사준 봉작 전작은 숭모회에서 봉행하였다. 전통 복식을 갖춘 유교식이다.
이른 봄에 늘 그 때를 생각하며 만세삼창을 목청껏 부르며 시작을 한다.

매곡 초등학교 앞에는 3·1운동의거기념비와 숭모비가 세워져 있다. 6·25참전용사비도 같이 있어 비석의 숲을 이루고 있는 성역이다. 숭모비 앞의 시비 ‘三一義擧崇慕詩’는 梅峰 안병찬, ‘해마다 3월이 오면’은 이 마을의 박희선 시인(서정주 추천)이 썼다. 글도 쓰고 글씨도 쓴 안병찬 전 숭모회장(가운데)과 이문세 유족대표 그리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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