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5대 왕 문종 때인 1452년(문종 2년) 5월 10일에 일어난 일이다. 관리로 일하던 오명의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다. 그는 관청에 있는 물건들을 몰래 훔쳐 쓰다가 결국 덜미가 잡혀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죄인을 감옥에 가두면 신속하게 판결을 하고 형을 집행했다. 당시에는 형벌이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등 다섯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관청물건 훔쳐 쓰다 붙잡혀
태형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것이었다. 형량에 따라 10대에서 50대까지 다섯 등급이 있고, 형구는 물푸레나무로 만든 작은 회초리였다.
그 다음 장형은, 태형보다는 조금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볼기를 치는데, 60대에서 100대까지 다섯 등급이 있고, 형구는 태형과 똑같았다.
도형은 일종의 징역형으로, 비교적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소금을 굽는 제염소나 쇠를 달구는 제철소 등에서 중노동을 하며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 등의 기간을 보냈다. 형량에 따라 장형 60대에서 100대까지의 형벌이 반드시 곁들여졌다.
유형은 일종의 유배형으로, 사형보다 한 단계 낮은 아주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했다. 유형에는 반드시 장형 100대를 곁들여, 귀양을 떠나기도 전에 매를 맞고 죽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사형은 역모를 꾀한 반역 죄인이나 패륜을 범한 중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목을 베는 참형과 교수형이 있는데, 조선 시대 형벌 가운데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다.
일단 감옥에 갇히면 죄인은 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사건 처리는 빠르게 했다. 보통 사형은 30일, 유형이나 도형은 20일, 장형, 태형은 10일 안에 판결까지 마치도록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아내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
조선 시대의 형벌에 대해 소개했는데, 오명의라는 관리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아내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한 것이다.
그날 그의 아내는 여종을 데리고 감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오명의의 목에 씌어진 칼을 벗겨내 여종의 목에 씌었다.
“머리를 가리고 바닥에 누워 있어라.”
아내는 여종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남편에게 여종의 옷을 입혔다. 여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상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여종으로 변장한 오명의를 데리고 유유히 감옥에서 나왔다.
그때까지도 오명의의 탈옥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도청에서는 뒤늦게 탈옥 사실을 알고 오명의를 찾아 나섰다. 그를 잡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에 방을 붙이고 상금을 내걸고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그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명의는 먼지처럼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공소시효 지나 자유의 몸 돼
오랜 세월이 흘러 그의 탈옥 사건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엉뚱하게도 오명의가 집안 사람들과 재산 다툼을 벌이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포도청에 잡혀 온 것이다.
그러나 포도청에서는 그를 감옥에 가둬 두지 않고 금방 풀어 주었다. 공소 시효가 지나 그를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형법에는 죄수가 탈옥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명의는 붙잡혀도 사형을 당하기는커녕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희한한 탈옥 사건이었다. 오명의 탈옥사건은 프랑스 영화의 빠삐용이 들었으면 울고 갈 희대의 탈옥스캔들이 아니었나 싶다.〈신현배/아동문학가, 시인〉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3심 제도나 보석 제도가 있었나요?”
조선 시대의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태형, 장형, 도형, 유형은 1심으로 끝나 형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사형의 경우에는 ‘삼복제’라는 것이 있어 2심, 3심까지 진행했다.
혹시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막아 보려고 말이다.
세종 때에 임성부라는 사람이 삼복제 덕분에 무죄가 밝혀져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는 2심까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아무리 심한 고문을 받아도 죄를 부인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세종은 이 사실을 알고 의금부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수사하라고 명해 그의 무죄를 밝혀냈다.
세종 때에는 보석 제도도 있었다. 세종은 추운 겨울이 돌아오면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무더기로 석방했다. 겨울에는 가족들이 옥바라지하기 힘들고, 죄수가 감옥에서 얼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처럼 조선 시대에도 죄인들의 최소한의 인격은 지켜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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