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희 정 회원 (충남 서산 해미중학교 2학년)
요즘 들어 날씨가 이상할 정도로 더워졌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더운 꼴이라니 정말 땀이 주룩 흐른다.
시험기간이라 주말에도 쉴 틈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다가 빼곡한 글씨들에 눈이 뻐근해 눈물이 날 지경에 이르면 고개를 들어 탁 트인 창문으로 눈을 옮긴다. 그러면 말로 표현 못할 푸른색들이 3D 영상처럼 눈에 확 와 닿는다. 해가 쬐이고, 새들이 울고, 바람이 부는, 뭐 하나 빠진 게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에 고였던 눈물이 마른다.
난 완벽한 시골 토박이다. 나쁘지 않다. 사람들이 촌년, 촌년 그러는데 그들은 촌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모를 거다. 건강 챙긴다고 특별히 삼림욕을 가는데 난 고개만 돌리면 산이고, 그들이 사는 그 탁한 곳, 이곳은 그런 걸 찾아 볼 수 없는데 뭘 바라겠는가?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신다. 농사는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인 듯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물이 부족한지 넘치는지, 모가 탔는지 안탔는지 아이 돌보듯 모두 섬세히 돌보지 않으면 그 해 농사는 망쳐버리고 만다.
할아버지의 일과는 새벽 4시부터다. 일어나 씻을 틈도 없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몇 년 째 친구인 경운기에 시동을 건다. 유일하게 가장 오래된 친구다. 몇 달 전 집에 불이 나 농기구들이 모조리 타서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기구들이 다 불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게 경운기였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경운기에 몸을 싣고 논으로 향한다. 아직은 그래도 어둡기 때문에 직접 가까이 가서 확인도 하신다. 잘 자라고 있는 모를 보시면 웃음이 나오신다고 한다. 작년에 모들이 타버렸을 때 할아버진 정말 자식들이 죽은 것처럼 슬피 우셨다. 내가 엄마와 함께 도시가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농촌에 사는 이유는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서 내가 인간다워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밭에서 몇 시간을 일하게 되면 목이 마르게 된다. 어릴 때 할머니가 걱정 돼서 얼음하고 물, 컵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할머니가 일하고 계실 깨밭에 간 적이 있다. 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편안한 흙냄새에 괜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물을 받아 드신 할머니는 “고맙다. 희정아!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는데 어떻게 알았니?” 라고 말씀하셨다. 웃기게도 난 그 때 분위기를 잡아 “바람이 전해다 줬지요”라는 당황스러운 말을 해 할머니를 웃게 해 드렸었다. 가끔 할머니가 이모부 앞에서 그 얘길 하는데, 이모부가 농사일을 도우러 내려오셨을 때 내가 방에 박혀있을 때마다 “희정아! 이따가 한 3시쯤 되면 바람이 이모부 물을 갖다 주렴, 이라고 할 거야, 꼭 실천하렴.” 이라면서 흐흐 웃으며 나가곤 하셨다. 민망했지만 어쨌든 어린 날을 되새길 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바람은 농부들의 땀을 식혀주고, 흙냄새나 꽃 냄새를 실어다 주며, 잎끼리 부딪쳐 소리도 나게 해준다. 사가각 사각 - 듣기만으로도 시원한 소리들에 옆머리가 휘날린다.
나는 최근 학교에서 단체 줄넘기 선수로 선발되었다. 처음엔 정말 하기 싫었고 줄넘기 하는 시간이 너무 싫었다. 아침부터 땀을 흘려야 한다는 사실이 끈적거렸고 찝찝했다. 하지만 그로써 바람의 가치를 알았다. 바람은 땀에 젖은 내 티셔츠를 말려줬다. 바람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들을 날려주었고, 얼굴에 맺힌 땀들도 날려주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바람의 느낌이 왠지 모르게 살갗에 가까이 와 닿았고 심지어 소름이 돋았다. 시원했다. 차가웠다. 따뜻했다. 이해 못하겠지만 그랬다.
농촌에선 이웃끼리도 가족처럼 너무 친하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듯이 정말 서로 가족관계까지 다 알고 있는 정도다. 오늘 아랫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정말 정정하셨던 분인데, 먹을 게 있으면 친히 우리 집까지 오셔서 “너희 이거 먹으렴”하시며 먹을 것을 주시던 분인데, 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응 그래 학교 가니?”, “차 조심하고 요즘 세상이 너무 험하다 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일찍 다니렴” 이라며 잔소리까지 하시던 분이 이렇게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안타깝고 슬펐다. 할머니께서 경주로 여행을 가셨었는데, 오늘 오시자마자 그 할아버지 댁에 가셨다. 할아버지랑 굉장히 친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셔서 마음이 아팠다. 연관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그냥 이웃집일 뿐임에 불구하고 나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마음이 짠해진 건 정 때문이 아닐까?
농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쁜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가는 이유 중 하나가 문화생활을 더 즐기기 위해서인데, 솔직히 그 면에선 도시가 낫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곳에서도 문화생활을 많이 누릴 수 있도록 외부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아 준다면 우리 농촌도 보다 풍요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래저래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 결국 돌아오지 않는가. 어차피 돌아올 곳, 조금 발전시켜 지켜나가며 살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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