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1 월간 제727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자랑할 만한 위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우리 민족을 구함으로써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끼친 영향은 지대해서 현재까지도 드라마나 영화의 주된 소재로 종종 사용되고, 경상남도 남해에서는 매년 10월이 되면 ‘이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를 열어 그의 공을 치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화문 광장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순신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노량해전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일본군의 철수 움직임을 간파하고,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더불어 함대를 출동시켰다. 이순신이 이끄는 300여 척의 전선은 노량 앞바다에서 500척의 적선과 맞부딪쳤다. 이순신은 뱃머리에 서서 손수 북을 치며 소리쳤다.

손수 공격 지휘 나서

“전원 공격하라!”
이순신의 공격 명령이 내려지자, 300여 척의 배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불을 내뿜었다. 그리고 조선 수병들의 화살이 일본군 함대를 향해 억수로 퍼부어졌다.
일본군 병사들도 지지 않고 조총과 화살로 맞섰다. 한동안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결전이었다. 조선의 수군과 일본군 병사들의 숨막히는 대립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팽팽한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불리하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조선 수군을, 일본군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 중 장렬히 전사

싸움이 길어지면서 일본 함대에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났다. 배도 반 이상이 침몰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일단 후퇴를 결정하고,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북을 치며 또 소리쳤다.
“추격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충무공 이순신의 단호한 명령에 조선 수군들은 힘을 얻어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이순신이 신음 소리를 내며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솟았다. 적이 쏜 총에 맞은 것이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달려왔다.
“아버지!”
맏아들 회가 통곡하며 완과 함께 부축하자 이순신은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이 알려져선 안 된다.”
하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싸움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노량해전에서 살아 돌아간 적선은 겨우 50여 척뿐이었다.
이순신의 최후를 전하는 이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쯤 지난 숙종 때에, 이민서라는 대신은 난데없이 이런 주장을 제기했다.
이순신은 갑옷을 벗고 전투에 나섬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즉, 이순신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죽음에 의문 품기 시작

이민서는 자신이 쓴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당시 송강 정철과 우계 성혼이 모두 당쟁에 화를 입었으며,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 장군도 무고를 당하여 억울한 죽음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여러 장수들은 자신의 처지에 회의를 품었고, 또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했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산 속에 들어가 화를 면했으며, 이순신도 전투에 갑옷을 벗고 나서서 스스로 탄환을 맞아 죽었다.
호남과 영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의병이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
이런 글이 나오고 나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고, ‘자살설’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신현배/아동문학가, 시인〉

♠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말고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서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밑에는 같은 이름의 장수가 있었다.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 바로 그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방답진 첨절제사로서 중위장이 되어 옥포해전에 나갔다.
그는 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전부장이 되었고, 당항포·한산도·부산포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 뒤 무의공 이순신은 다른 벼슬을 맡아 충무공 이순신과 떨어져 있다가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 함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적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자, 무의공 이순신은 지휘권을 물려받아 수군을 총지휘했다. 참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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