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기억과 역사적 상처의 버무림
누군가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요 며칠, 스스로에게 ‘왜 책을 읽느냐?’ 묻고 답을 해보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까?’, ‘직업이라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모두 답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꺼내본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열권이 한 질인 동화집을 사오셨다. 그리고는 1권부터 순서대로 읽으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1권이 아니라 10권이었다. 그 10권을 읽기 위해 나는 1권부터 순서대로 책을 읽어갔다. 그렇게 열권의 책을 다 읽고 난 후부터 책 읽는 일이 즐거워졌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도 책 읽기는 즐거운 작업 중 하나이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독서와 관계있는 참 좋은 책 한 권이 떠오른다.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이다.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은 저자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과 추억을 절묘하게 버무려 놓은 독서노트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을 이야기할 때, 그가 재일교포 2세라는 것, 그리고 두 형인 서승과 서준식이 재일교포 유학생 형제 간첩사건에 연루됐고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거의 20년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후기에서 그는 ‘이 책에 점묘해 놓은 모습이 우리 형제의 소년 시절이라면, 이 뒤를 잇는 청년시절은 두 형은 옥중에서 고통을 받고 나는 노심초사 번민하는 사이 지나가 버렸다’고 토로하고 있다.
일본 땅에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아야 했던 저자는 ‘왕자와 거지’를 읽으며 ‘언젠가 진짜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오시지 않을까?’라는 몽상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가 바라던 ‘진짜 부모님’은 동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돈 많은 부자나 귀족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본인이었다는 대목에서는 민족차별을 당하며 힘들어 하는 소년 경식과 만나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렸다.
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자식에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어머니는 학부형들에게 전달되는 통지서를 읽지 못했다. 때문에 어린 경식은 급식비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게 된다. 선생님 앞에 불려 나가 왜 급식비를 내지 못했느냐는 추궁을 받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문맹이라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의 주인공 마르틴 타라처럼 ‘절대로 울지 말자!’며 다짐하지만 끝내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은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 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홀리려’고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하며 쓴 ‘제2서문’이었다.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마음에 들었다는 에리히 케스트너의 서문 중 일부를 소개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작품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소년시절에 대한 애착이다. 어릴 적 정경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마음속에 되살아날 때면, 이상하리만치 책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도 이따금 위기를 모면하고 용케 책장과 서랍 속에 살아남은 낡은 책들을 펼쳐들 때가 있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고. 사명으로 여기고 책읽기에 매진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많은 즐거움을 제공한다. 하지만, 가을이지 않은가? 책이 건네주는 기쁨을 받아 누리기 좋은 10월이다. 책 읽기에 어울리는 계절이다. 손닿는 곳, 눈길 머무는 곳에 놓여 있는 책 한권을 펼쳐 읽으며 살아가기에 알맞은 때이다.
〈정진아 / 방송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