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1 월간 제722호>
<4-H 지도 현장> 4-H단체 자율적인 활동 필요

<강 형 곤 지도사>

2007년 9월 늦은 나이에 신규농촌지도사로 공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 접한 공직업무가 4-H회 담당이었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도덕·윤리시간에 교과서에서 한 줄 보았던 4-H라는 생소한 단어, 그리고 여름방학 때 시골에 가면 마을 입구에 서 있던 클로버 그림을 보며 ‘저게 뭘까?’ 라는 생각을 했었던 나인데, 이제는 그것을 알리고 키우고 아끼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 4-H회원들과 만난 순간 왜 전임자가 그토록 나에게 이 일을 넘겨주려고 애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10대의 학생4-H회원에서부터 청·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4-H회는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런 나에게 “우리나라 농촌의 근간을 이루었던 4-H회원에 대해 이해하고 현실에 맞게 지도해야 한다.”는 교육과 선배들의 조언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4-H업무를 시작하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영농회원과의 마찰을 풀어야 하는 것도 커다란 숙제였고, 4-H지도교사와 의사소통의 부재, 학생4-H회원들과 함께 해나가야 할 행사의 어려움 등은 전국의 4-H담당자만이 알 수 있고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업무라면 어차피 해야 할 일. 차근차근 하나씩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풀어야할 실타래는 4-H연합회 회원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마음을 열고 연합회의 임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니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한 곳에 있었다. 우리 용인시4-H연합회원들의 문제는 4-H를 너무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이었다. 회원들이 행사면 행사, 교육이면 교육 무엇이든 열정적인 자세로 임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합회 회원들 간에 마찰이 생기면 부족하지만 내가 중재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 4-H관련 사업을 4-H연합회 회원이 주체가 되어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에는 농업기술센터의 4-H담당자가 중심이 되어 사업을 진행했지만, 현재는 4-H가 민간화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관이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4-H연합회 임원들이 주축이 되어 회의를 진행하고,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 후로 3년이 지난 지금 용인시4-H연합회는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바뀌었다.
실타래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지 모르겠지만, 한 곳을 잘 풀어내니 다른 부분들까지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연합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4-H회원들과 4-H지도교사들, 4-H선배단체, 또 지역단체와의 관계들도 순조롭게 맺어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10대 20대를 지나며 관공서에는 주민등록증 만들 때만 가봤다. 하지만 우리 4-H회원들은 그 나이에 이미 농업기술센터라는 관공서에 드나들며, 회의하고 때로는 언성 높여 주장을 내세우고, 행사도 계획하고, 사업도 실행하고, 여러 가지 대외적인 활동을 한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4-H가 아니면 우리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디에 가서 이런 활동들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4-H활동을 오래한 지도자분들이 본다면 고작 3년의 경험에 웃을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의 3년이 앞으로 농촌지도사 업무의 근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개인적으로도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용인시4-H회원들이 지·덕·노·체 4-H이념을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지역사회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열심히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경기 용인시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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