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아끼는 사람, 인색한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한다. 자린고비라는 말은 ‘결은고비’에서 비롯되었다. ‘겯다’는 기름에 적신다는 것이고, ‘고비’는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뜻한다.
어떤 구두쇠가 부모님 제사를 드리는데, 지방을 기름에 결어 사용했다고 한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태워 없애는 것이 아까워 지방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 이렇게 해서 생긴 말이 ‘결은고비’이고, ‘절은고비’를 거쳐 ‘자린고비’가 되었다.
‘결은고비’에서 비롯돼
조선 시대에 자린고비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관리들 가운데 첫째 가는 자린고비라면 순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규완을 꼽을 수 있다.
그가 고을 원님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잔칫날도 아닌데 그 집에서는 원님이 오셨다고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잔뜩 차렸다. 그런데 이규완은 젓가락을 들지 않고 음식상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사또 나리, 왜 그러십니까?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 아니오. 맛있게 잘 먹겠소.”
이규완은 한참 만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주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이규완이 말했다.
“뒷간이 어디 있죠?”
“아, 예. 밖으로 나가시면 외양간 옆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주인은 이규완이 볼일을 보러 가는 줄 알고, 이규완을 뒷간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이규완은 뜻밖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장, 제가 아주 지나친 대접을 받아서 그 값을 하고 싶은데…. 똥지게를 가져다주시겠소? 이것저것 배불리 먹었으니, 먹은 만큼 일해야 하지 않겠소.”
이규완은 똥통을 찾아내어 뒷간에서 똥을 퍼 담았다. 그리고 그 똥통을 지게로 지어 나르는 것이었다. 주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사또 나리, 그 일은 아랫사람에게 시키시는 것이….”
“아니오. 내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 죄송해서 그런 것이요. 나는 세 가지 반찬에 밥과 국만 있으면 되는데….”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원님을 진수성찬으로 대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님이 낭비를 싫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랏돈 함부로 쓰는 법 없어
이규완은 이름난 자린고비였다. 집에서는 식구들에게 빨래는 냇가에서 하지 말고, 반드시 샘물을 떠서 하게 했다. 빨래하고 남은 물을 텃밭에 버려 거름으로 쓰려고 말이다. 그래서 이규완은 땟물까지도 아끼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나랏돈이라고 함부로 쓰는 법이 없었다. 고을을 떠나 출장을 다닐 때는 객사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객사는 벼슬아치들을 묵게 하던 고급 숙소였는데, 그곳에 가지 않고 낡은 주막집에서 잠을 잤다.
물론 여행 경비를 아끼려고 말이다. 주막에서도 그는 쉬지 않았다. 저녁 시간에는 볏짚으로 짚신을 삼거나, 대나무로 이쑤시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남들에게 거저 주었다.
이규완은 아주 부지런했다. 관아에서 일을 마친 뒤에도 쉬는 법이 없었다. 손수 농기구를 만들거나 가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뒷간에서도 시간 아까워 일해
또한 이규완은 뒷간에서도 일하는 원님으로 백성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볼일을 보는 그 시간이 아까워, 삼으로 노끈을 꼬는 것이다.
그렇게 꼰 노끈으로는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이하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규완은 이렇게 백성을 위해 일한 자린고비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규완은 평생 ‘하나빼기’ 철학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 끼 밥도 한 끼를 빼고 두 끼만 먹었고, 옷을 만들 때 광목 여덟 자에서 한 자를 빼고 일곱 자로 만들게 했다. 또한 일곱 마디 갓끈은 한 마디를 빼고 여섯 마디로 매었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조선시대에 자린고비로 이름 높았던 사람은 또 누가 있었나요?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류관의 집은 장마철이면 모든 방이 비가 샜다. 그래서 갈모를 쓰고 지내야 했다. 갈모는 기름종이로 원을 만들어 원추형으로 접어, 비가 오면 모자 위에 덮어썼던 물건이다. 또한 류관은 자기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늘 탁주 한 잔만 대접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잔치를 벌일 때도 손님에게 내놓은 것은 탁주 한 잔씩과 김치, 새우젓 한 사발뿐이었다.
문장이 뛰어나 세종 때 거의 20년 동안 대제학을 맡았던 변계량은 류관보다 더 지독했다. 수박이나 참외를 먹다 남으면 꼭 금을 그어 표시를 해 두었다. 손님이 찾아와서 술을 마실 때도 일일이 잔 수를 헤아려 적어 놓으니, 상대방은 술을 많이 마실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집에 음식이 쌓여 있어도 하인들에게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다. 작은 물건일망정 절대로 남에게 빌려 주지 않으니, 그에게 손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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