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1 월간 제718호>
<지상강좌> 4-H회의 역사적 변천과정

우리나라에서 4-H활동이 시작된 역사적 배경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하나는 1926년에 동아일보에 의하여 소개된 ‘사각청소년회’로서 YMCA에서 청년조직의 하나로 미국에서 도입하였다는 견해이며, 다른 관점은 1947년 미 군정기에 경기도에서 조직하기 시작한 ‘농촌청년구락부’를 4-H의 효시로 보는 것이다. 1926년 당시는 일본의 강점기로서 4-H활동이 일반화되지 못하고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4-H활동은 광복 후인 1947년 미군정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H회의 변천과정에 대하여는 자료에 따라 시대적 구분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4-H활동이 중앙의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도 농업기술원과 시·군의 농업기술센터 등 농촌진흥기관이 주 담당기관으로서 도입 초기에서부터 관장을 해왔기 때문에 이들 농촌진흥기관의 변천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여러 관련 자료를 참고하면서 농촌진흥청 발족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누어 1961년 이전의 농촌진흥청 전신이었던 농사개량원과 농업기술원, 그리고 농사원 시절의 4-H회를 태동기(1947~1961)로 보고, 농촌진흥청 발족 이후는 기반확립기(1962~1970), 성장기(1971~1980), 변혁기(1981~1990), 재도약기(1991~현재)로 구분하여 변천과정을 개괄하였다.

① 태동기(1947~1961)

우리나라에 4-H회가 소개된 것은 미 군정시절인 1947년 3월, 경기도내 시장·군수 및 민간유지 등의 합동회의에서 당시 경기도지사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군인 앤더슨(Charles A. Anderson) 대령이 미국의 4-H회라는 청소년조직을 소개하였는데 이에 관심을 갖게 된 구자옥(具滋玉)지사 등 유력인사들을 주축으로, 4-H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조직체 명칭을 여러 논란 끝에 ‘농촌청년구락부’로 결정하고, 양주와 여주지역을 비롯한 도내 각 시군에 1~2개 구락부(club)를 시험적으로 조직하도록 하였다. 또한 구락부 운영을 위하여 각 구락부 대표회원들을 안양종축장, 안양임업시험장, 용인군 추계리농장 등에서 1~3주간씩 단기교육을 실시하였다. 주로 단체과제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경진대회도 개최하는 등 시험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정부에서 필요한 보조금을 예산에 확보하는 등 제도적으로도 정착하는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경기도내 1900여개 구락부에 5만여 회원을 헤아리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고, 정착되기 시작하였던 4-H회 육성사업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나, 휴전이 되면서 1952년에는 농림부가 4-H육성사업을 전국 사업으로 채택, 확대하기로 하고 내무부와 협동하여 보호 육성하도록 방침을 세움으로써 4-H사업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 각 분야를 지원하기 위하여 1953년 8월, 한미재단이 발족되었다. 1954년에는 예비역 대령 앤더슨 씨가 재단 고문으로 부임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민간 지원단체인 ‘한국4-H구락부 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가 결성되었으며, 연말에는 제1회 4-H중앙경진대회가 서울 반도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수립과 지원체제를 바탕으로 4-H사업을 전후 복구와 농촌재건운동과 연계하여 추진하였다.

② 기반확립기(1962~1970)

1957년도에 농사원이 설립되어 농업연구 및 농촌지도사업을 제도적으로 확립하였으나 1961년도에는 도 농사원을 도지사 소속으로, 시군 농사교도소를 시군으로 편입하는 등 농촌지도체계의 이원화로 혼선과 비능률 문제가 제기되고 있던 중, 1962년 3월 농촌진흥법의 공포로 농촌진흥청이 발족되고 농촌개발과 농촌지도사업을 농촌진흥기관에서 체계적으로 추진하게 됨으로써 4-H사업도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965년에는 청소년과를 설치하여 4-H특기지도사의 부활을 비롯한 민간단체의 육성과 자원지도자 연찬회, 4-H연합회의 육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밖에 4-H회원의 연령이 10~20세에서 13~24세로 조정되었고, 전국대학4-H연구회 연합회의 결성, 4-H신문의 발행, 4-H운동 발전연찬회 개최, 전국4-H지도자 야영대회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됨으로써 4-H사업의 기반이 확충되었다.

③ 성장기(1971~1980)

1970년대는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4-H사업도 크게 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새마을 운동에서 강조된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은 4-H회의 ‘지, 덕, 노, 체’이념과 상통하는 점이 많아 4-H회원들이 4-H활동 차원에서 쉽게 동참할 수 있었고, 따라서 4-H사업은 새마을운동과 함께 마을단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확산될 수 있었다. 4-H회원들은 농어촌의 환경개선, 농업생산기반의 정비, 주곡의 자급기반 확충 등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4-H사업의 발전을 위한 각종 회의도 개최되어, 1971년의 제9차 농촌청소년지도자회의, 1976년의 한국4-H운동 30주년 기념을 겸한 연찬회 등을 통해 4-H지도자들이 4-H사업의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④ 변혁기(1981~1990)

4-H중앙연합회가 1981년도에 결성돼 새마을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면서 ‘4-H구락부’가 ‘새마을 청소년회’로 명칭이 바뀌고, 4-H사업의 조직관리도 새마을운동본부로 이관되었다. 1983년에는 한국4-H후원회 사업도 일부가 새마을운동본부로 이관되고, 후원회장도 당연직에서 선출제로 바뀌었다.
4-H회의 조직관리가 새마을운동본부로 이관되었지만 새마을운동 지방조직이 4-H사업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지 못한 관계로 조직관리는 농촌진흥청이 계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업추진체계의 이원화 등 여러 가지 혼란이 초래되었다. 1988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마을청소년회가 4-H회로 명칭이 환원되기는 하였지만, 80년대의 4-H사업은 명칭변경, 조직관리의 이관 및 환원 등 전반적으로 변화를 거듭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⑤ 재도약기(1991~현재)

4-H사업 관리가 1991년에 농촌진흥청으로 환원되었으나 10여 년간의 공백상태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그간 농업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부녀화 그리고 농산물 수입개방 확대 등의 국제화와 세계화에 따른 무한경쟁시대의 도래 등 농업의 내외적 여건이 급변하면서, 영농4-H회도 조직이나 회원 수 등에서 불가피한 감소현상이 초래된 반면, 학교4-H회 조직이 활기를 띠게 되어 1998년에는 학교4-H지도교사 교육을 시작하고, 지도교사협의회도 구성하였다.
1997년 1월에 지방농촌진흥기관의 지도직공무원들이 지방직으로 전환되면서 4-H사업을 비롯한 농촌지도사업이 지역 실정에 따라 다양화 되고 농촌지도기관의 조직 및 인력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영농4-H회원의 감소는 이제까지 추진해왔던 4-H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개선을 필요로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4-H후원회’를 ‘한국4-H본부’로 개편하고, 회원의 연령을 13~29세에서 9~29세로 폭을 넓혀 초등학교까지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학교4-H 활성화를 위한 기틀을 다졌다. 2007년에는 ‘한국4에이치활동 지원법’을 제정하여 4-H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하고, 또한 4-H사업의 민간화를 촉진할 수 있게 되어 2008년에는 ‘한국4-H본부’를 4-H활동 주관단체로 지정하였다.
그간 4-H회 조직의 변화를 연대별로 명칭과 대상연령, 조직단위, 육성목표 등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47~52=4-H구락부, 20~30세, 이동, 중견농민 육성 △1952~62=4-H구락부, 10~20세, 이동, 민주시민 양성 △1963~78=4-H구락부, 이동, 13~24세, 이동, 2세 영농주 육성 △1979=새마을청소년회, 13~26세, 이동-읍면, 민주국민, 영농후계자육성 △1980~87=새마을청소년회, 13~29세, 이동-읍면, 민주국민, 영농후계자육성 △1988~90=4-H회, 13~29세, 이동-읍면, 건전하고 생산적인 청소년 △1991~2000=4-H회, 13~29세, 학생-영농-특수, 정예농업인력 양성 △2001~현재=4-H회, 9~29세, 학생-영농-일반, 민주시민정신, 전문농업인 양성
이처럼 농업농촌의 변화는 4-H의 여건에도 커다란 변혁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근대화를 통한 자본주의화는 농업농촌의 상대적 열악성을 부각시켜 농촌사회의 공동화와 농업의 붕괴라는 문제점을 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농업농촌의 변화가 주는 상대적 긍정성도 크다고 보여지지만 이러한 변혁의 한복판에 서있는 관점에서 4-H의 이념에 대한 변화는 당연한 귀결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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