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길 풍경 - 이동희 / 소설가
"사회고 정치고 간에 너나없이 너덜거리는 구각을 벗고
새 살을 내어 보이듯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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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보러 가던 괘방령 옛길을 살리려는 영동군 매곡면의 노력으로 마을 이름을 새긴 자연석탑을 쌓았다. 김천시에서도 그 자리에 표석을 세웠으나 정확한 도계에 옮겨 놓도록 하였다. 정자도 세우고 정취 있게 조경을 하려고 한다. 왼쪽부터 안병국 이장협의회회장, 김명기 면장, 이광진 부면장, 박우양 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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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이 달라졌다. 골목 이름이 새로 생긴 것이다. 집집마다 번지 대신 큼지막하게 무슨 길의 몇 호라고 써 붙여지고 그것이 문패를 대신하였다. 문패는 그대로 옆에 고풍하게 붙어 있기도 하고 번지가 같이 씌어진 것도 있지만 이제 그런 것보다 숫자로 기억하고 관리되도록 한 것이다. 시골 지역도 주소 체계가 바뀐 것이다.
새로운 풍경이다. 그의 집은 노천2길 5-1이다. 영어로도 병기해 놓아 외국 사람도 알게 했다. 집집마다 1, 2, 3, 4 또는 1-1, 1-2 그런 고유번호가 있고 그것을 새뜻하게 디자인한 판에 크게 써 붙여 놓은 것이다. 그것이 편리할지 좋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정책이니 따르는 것이고 한 참이 지나고 멀리는 한 세대가 지나면 그렇게 굳어지고 익숙해 질 것이다.
골목길에도 새 이름 생겨
요즘도 노인들은 신작로(新作路)라고 부르는 큰길 49번 도로 옆으로는 민주지산길이다. 노천 2길 초입에는 ‘민주지산길 3565’라고 써 붙여져 있다. 가로 길 이름이 있고 세로 길 이름이 있는데 민주지산 길은 세로 길인 것 같다. 길 이름 지명에 대하여 그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셈이다.
길 이름을 처음 제정할 때 그는 서울 강남구 지명위원이었다. 지금 주소는 바뀌어도 그것이 변동된 것은 아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의뢰가 오지만, 아마 잘 모르긴 해도 그 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 단계였다. 도무지 중구난방이고 원칙이 없는 자료들을 가지고 여러 달 씨름을 하였다. 그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 서명을 하기엔 너무나 양이 많고 도저히 책임을 질 수가 없었지만 공무원들은 시간 안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옛 지명을 되찾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 때 뻔질나게 들랑거리던 미국의 길 이름을 정하는 룰을 적용하였다. L.A.에서는 동서로 뻗은 길을 스트릿(street)이라고 하고 남북으로 난 대로를 에브뉴(avenue)라고 하였다. 이 시골 고샅길에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났다.
3도3군 만나는 삼도봉
좌우간 민주지산길로 계속 올라가면 민주지산에 도달한다. 영동 무주로 가는 도마령을 넘어서이다. 그 중간에 궁촌리, 흥덕리로 해서 우두령을 넘어 가는 길이 있고 물한리로 해서 삼도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도마령을 넘어가면 민주지산을 지나 영동 용화면으로 해서 무주군 설천면으로 이어지는 전라도 땅이고 우두령을 넘어가면 금릉군 지례면이 되는 경상도 땅이다.
물한리로 해서 계속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도봉에 닿는다. 경북(김천시 부항면), 전북(무주군 설천면), 충북(영동군 상촌면) 삼도의 귀퉁이가 합쳐지는 삼도봉은 해발 1176미터로 1242미터인 민주지산 다음 봉우리이다.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이다. 그 꼭대기 정상에는 제법 펀펀하여 매년 10월 10일 군수, 교육장, 면장, 이장, 주민 등 많은 관민이 합동으로 삼도 화합의 잔치를 벌이고 농악대에 맞추어 춤을 추기에 충분하다. 그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산골이고 오지이고 벽지이지만 요즘은 버스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가끔 그는 버스를 혼자 타고 갈 때가 있다. 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괘방령로, 강진리 용계촌을 지나 괘방령을 넘어 직지사 김천으로 가는 버스도 혼자 탈 때가 많았다. 자가용이었다. 적자 운행을 시군에서 보조해준다고 한다.
괘방령은 김천 황간으로 가는 추풍령 대신 넘는 고갯길이다. 짚신을 한 짐 짊어지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추풍령을 넘어가지 않고 뒷길인 괘방령을 넘어갔다는 것이다. 추풍 낙엽 신세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데 한 사람 두 사람 그렇게 입소문이 나서 어느 사이 정설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국도 1번 도로로 가지 않고 뒷길인 괘방령을 넘었고 장터(지금은 마을이 없는 수원리 앞 위치)로 해서 시누재를 넘어 영동으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 코오스를 일명 과거길이라고도 하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험-과거가 시험 아닌가-앞에서는 그지없이 너역하다. 교문에다 엿을 붙이고 찰떡을 먹고 미역국은 먹지 않는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전라도에서는 낙지국을 끓여먹지 않는다.
길처럼 마음이 새로워져야
민주지산길로 올라가다가 노천 1길 25는 이재후 집이다. 나이가 조금 아래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집안 조카이다. 태풍 루사의 피해를 입어 모든 마을이 내려앉았을 때 새로 지은 집이다. 다시 있을지 모를 수해에 대비해 덩그렇게 높이 지은 벽돌집으로, 마당을 앞 길가 쪽으로 다 빼고 뒤 산 밑으로 집을 앉히었다. 그러고도 공간을 더 가지기 위해 지붕을 슬라브로 하였다.
마당가로 장마 전에 있던 나지막한 창고가 있었는데 그 위로 높직하게 감타래의 지붕을 덮어놓아 미관을 해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주인은 들에 나가고 없다. 눈만 뜨면 포도밭에 나가 산다.
“어짠 일이라.”
밭으로 찾아간 그가 포도나무 사이로 걸어 나오며 터실터실한 손을 부빈다.
“벌써부터 뭘 하는 거지.”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 꽃샘바람이다.
“껍데기를 벗기는 기라.”
“그러면 나무가 죽지 않아?”
“너덜거리는 묵은 껍데기를 벗겨야 하는 거여. 그래야 새 살이 나오지.”
“그래?”
그는 참으로 근엄한 강의를 듣는 듯하였다. 껍데기는 가라이다. 거무스레한 농투성이의 얼굴 대신 굵은 손마디를 바라보았다.
“사람 사는 이치가 같네. 정치를 하는 것도 그렇고.”
“무슨 소릴 하는 기라?”
사회고 정치고 간에 너나없이 너덜거리는 구각을 벗고 새 살을 내어 보이듯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큰길 여기 저기 나붙기 시작한 6월 지방선거 현수막을 보며 생각하였다.
길이 새로워지듯이 마음이 새로워져야 마을도 나라도 새로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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