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1 월간 제718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벼락은 하늘이 내리는 징벌?

"벼락을 맞았는데도 집은 멀쩡한 대신, 집 안에 있던 신응주의 아내와 딸과 종들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1606년(선조 39년)에 있었던 일이다. 역관 신응주는 사신을 따라 중국을 드나들며 무역을 하여 부자가 된 사람이다. 역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벼슬도 정2품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 다른 역관들에게 모함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신응주는 부모님이 80세가 넘었다. 신응주의 형제 중에는 부모님을 모시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자식들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신응주의 아내는 성질이 못되고 간교한 여자였다. 신응주가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려고 해도 번번이 훼방을 하고 못된 짓을 저질렀다. 신응주가 자신이 나라에서 녹으로 받은 백미를 부모님에게 보내 드리라고 하면, 아내는 쌀에 모래를 섞어 보냈다. 그리고는 신응주에게 시키는 대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신응주의 아버지가 아들집을 찾아왔다. 그때 신응주는 외출을 해야 하기에 아내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내가 약속이 있어 나가니 아버지에게 저녁상을 차려 드리시오.”
“걱정하지 말고 얼른 다녀오세요.”
하지만 아내는 날이 저물어도 저녁상을 차리지 않았다. 아예 시아버지에게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못된 며느리네. 시아비가 오랜만에 왔는데도 저녁 한 끼 안 줘?”
화가 치민 신응주의 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신응주는 며칠 뒤에 이 일을 전해 듣고 아내를 나무랐는데 아내는 펄쩍 뛰며 말했다.
“내가 시아버지에게 저녁을 차려 드리지 않았다고요? 당신은 그 말을 믿어요? 만약에 내가 시아버지를 굶겼다면 벼락을 맞을 거예요.”
신응주는 아내가 완강하게 부인하니 아내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대궐에 들어갔다. 집에는 아내와 딸과 종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바로 “우르르 쾅!” 하고 신응주의 집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윽고 신응주의 집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집이 벼락을 맞았는데도 멀쩡한 대신, 집 안에 있던 신응주의 아내와 딸과 종들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1606년 7월 26일 오후 4시였다. 사람들은 신응주와 신응주의 아내가 불효하여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얼마 뒤 신응주는 불효죄로 체포되었고, 곤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다.
그는 아내가 부모님에게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을 까맣게 몰라, 자신은 죄가 없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역관들에게 모함을 받아 이런 수모를 겪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신응주의 아내는 자기가 말한 대로 되었다. 시아버지를 굶겼다면 벼락을 맞을 거라고 했으니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벼락을 하늘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당하는 벌로 생각했다. 특히 유교에서는 효도를 강조하려고 벼락을 하늘이 내리는 징벌로 여겼다.
남도의 산골에서는 들판에서 천둥 번개를 만나면, 사람들이 돌아가며 그 동안 숨겨 왔던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죄를 뉘우쳐야 벼락을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도교에서는 천둥 번개를, 하늘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천둥 번개가 쳐도 선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이완용의 집에도 벼락이 떨어졌다면서요?

이완용이라고 하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하고는, 일본 정부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15만 원을 받았다. 조선 왕실의 일 년 예산이 75만 원이었으니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었다.
한일합방 후에 이완용은 순화궁에서 남부럽지 않게 지냈다. 순화궁은 옛날에 인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고,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이완용은 이 집을 자신의 별장으로 만들어 1908년부터 친일파들의 사교장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어느 날, 순화궁에 벼락이 떨어져 정원에 있던 큰 나무가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그러자 서울 장안에는 곧 이런 소문이 돌았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더니 하늘의 벌을 받으려는 모양이구나.”
이완용은 겁도 나고 기분도 안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순화궁을 팔려고 내놓았고, 1918년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이 집을 사서 명월관 분점인 태화관을 열었다. 뒷날 태화관은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 선언을 한 곳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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