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1 월간 제717호>
매화골 통신 ① 내일부터 들로 나가야 한다

- 정월대보름 쇠기 -    이동희 / 소설가

연재를 시작하며
전국의 4-H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4-H신문에 ‘돌아온 사람’을 연재한 것이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 뒤 낙향하여 대작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살며 농촌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꽁트에 담아보려 합니다. 소설이지만 실제의 이야기입니다. 나레이터는 3인칭, 필자를 닮은 기자입니다.
※이동희 선생님은 농업과 농촌에 깊은 애정을 갖고 계십니다. 많은 애독 바랍니다. 〈편집자 주〉

"입춘이 지나면 봄인데 우수 경칩이 지나야 기지개를 켜고
들로 나간다. 정월 대보름은 마지막으로 노는 명일이고
이제 내일부터 들로 나가 뭐가 됐든 일을 해야 한다."

매화나무의 꽃망울이 맺기 시작하였다. 마을에 어느새 봄이 와 있었다.
이름처럼 매화가 집집마다 허들지게 피어 있지는 않은 동네다. 언젠가부터 이 집 저 집에서 매실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조금 있으면 다른 꽃과 같이 어우러져 꽃 잔치를 벌이게 되지만. 매화 매(梅)자 골 곡(谷)자 매화골의 이름이 매화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효자 매한손이 살았던 마을

이 마을에서 나고 어린 시절과 도로 애가 되는 시기에 돌아와 살고 있는 그도 정확히 잘 모르고 있다. 효자 매한손(梅漢孫) 이 마을에 살았다는 데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린 매효자에게 중종 14(1519)년 충순위 벼슬을 내리고 이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여각을 효자문이라 하여 들고 날 때마다 삶의 도리를 생각하며 소중히 지키고 있다. 그 때 심었다는 노거수 느티나무 그늘에 쉴 때마다 이 효자의 마을에 사는 기쁨을 느끼곤 한다. 아,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경부선의 정 가운데 지점인 황간역에는 무궁화호 기차가 하루 서너 번 서고, 거기서 한 시간-통학시간에는 30분 정도 간격으로 물한리-고자리-천덕 세 골짜기로 가는 버스를 타면 10분도 안 걸려 세 아름은 되는 동구나무 아래에 내린다. 바쁜 일이 있거나 버스가 끊어지는 저녁 8시가 지나면 택시를 타야 한다. 6000원 정도, 빈 차로 돌아와야 하지만 왕복 요금을 받지는 않는다.
면사무소가 있는 노천리를 택시 기사들은 소재지라고 한다. 상 중 하리 300호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된다. 노천리뿐 아니라 8개 동리 28개 마을에 빈 집이 많이 늘고 자꾸 이농을 하여 인구 2000명 남짓한 매곡면은 황간면과 합병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파트라든지 효도상품을 핑계로 시골에 살면서 도시의 아들집에 주민등록을 올려놓은 노인들도 있었다. 되민증이 어떻고 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는 향리에 흙장을 찍어 옛날 집터에 집을 짓고 내려오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도 새로 지었다. 살고 있는 노천 상리를 줄여서 부르는 노상으로 하였다. 발음상으로 다른 뜻이 있었다.
입춘이 지나면 봄인데 우수 경칩이 지나야 기지개를 켜고 들로 나간다. 정월 대보름은 마지막으로 노는 명일이고 이제 내일부터 들로 나가 뭐가 됐든 일을 해야 한다. 열나흘날 밤에는 동구나무에 금줄을 치고 동제를 지낸다. 제주는 마을 회장인 이종수 교장이다. 며칠 전 외지에 나가 사는 마을 유지 강춘식이 죽어 모두들 문상을 갈 때 이 교장은 가지 않고 몸을 삼갔다.
회관에 모여 밴쿠버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 12시가 되어 동제를 지내러 나가는데 그도 따라 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붙들었다. 안 된다는 것이다. 문상을 갔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은 TV를 보며 기다려야 했다. 이 교장은 넥타이를 맨 위에 입은 두루마기를 벗어 놓고 와 앉으며 설 이후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음복을 하며 보고하였다.

대보름 마을 사람과 어울려

<정월 대보름날 저녁 마을회관에 모인 동네 노인들이 남녀로 나누어 매화 오곡밥을 먹고 윷놀이를 하였다. 박우용 할머니가 던진 윷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개인가 걸인가. 음식과 상품은 몇 집에서 추렴을 하였다고 이장 부인이 광고를 하였다.>
“다른 것도 잘 했나 몰라.”
두주를 불사하는 재우가 한약을 먹는다고 사이다를 마시며 말하자 모두들 까르르 웃었다.
“염려 말아요.”
제를 지낸 돼지머리를 썰어 제주를 나누어 마셨다. 백설기 떡도 하고 감, 대추, 밤도 있었다.
이튿날 저녁 때 스피커로 상리 회관으로 모이라고 해서 갔었다. 남녀로 갈라 윷놀이를 한다는 것이었다. 부녀회원들이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오곡밥에다 무 콩나물국을 차려 내놓았다. 그리고 누구라든가 결혼을 하였는데 이바지 떡도 같이 상에 올라 있었다. 참으로 먹음직스럽고 군침이 돌았다.
막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물한리에서 달집태우기 행사를 하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군의 행사인데 오랜만에 달불 놓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과 한 자리에 있다가 미안한 대로 사정을 얘기하고 일어섰다.
“그냥 앉아여 그만.”
“쌔기 먹고 가면 되지.”
노인들 여럿이 그를 붙들어 앉히었다. 그러나 약속을 하였고 다리껄로 차를 몰고 오고 있으니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좋은 데가 있으면 가야지, 누가 그렇게도 말하였다. 군수가 오는 데로 가느냐고 들리었던 것이고 그 말이 걸리어 인사까지 하고 가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좀 열적은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오곡밥을 뜨기 시작했다.
어제 밤도 그랬고 오랜만에 보려던 전통적인 정월대보름 행사 참례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했다. 아직 살 날이 많았다.

이동희 선생님은 1938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1961년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 단국대 국문학과 교수 및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저서로는 ‘땅과 흙’, ‘단군의 나라’, ‘죽음의 들판-노근리 아리랑’ 등이 있으며, 무영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농민문학기념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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