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들은 모임에서 큰 바가지로
술을 돌려마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동료애를 다졌던 것이다.
옛날에 어느 등짐장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여 500냥을 벌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지 몇 년이 되어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집으로 오는 길에 많은 비가 내려 개천이 넘쳐흘렀다.
저 개천을 어떻게 건너가나 궁리하고 있는데, 상류 쪽에서 젊은이 한 사람이 떠내려가는 것이다. 물이 깊고 물살이 빨라 아무도 그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속에 뛰어들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등짐장수도 젊은이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헤엄을 칠 줄 몰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저 젊은이를 구해 주시오! 그럼 제가 가진 돈 500냥을 드리겠소!”
그러자 한 청년이 용감하게 물속에 뛰어들어 젊은이를 구해 주었다. 등짐장수는 약속대로 청년에게 500냥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그때 젊은이가 등짐장수에게 말했다.
“저의 집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등짐장수는 젊은이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젊은이의 아버지는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아들에게 사연을 들은 부자는 등짐장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3대 독자 내 아들의 목숨을 건져 주다니, 당신은 우리 집안의 은인이오.”
부자는 등짐장수에게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3000냥을 주었다. 등짐장수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고 복을 받은 셈이었다.
옛날에 이 등짐장수처럼 물건을 팔러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부상’이라고 불렀다. 보부상은 댕기, 비녀 등의 장식품과 금은세공품을 팔러 다니는 보상(봇짐장수)과 소금, 옹기, 짚신, 생선 등을 팔러 다니는 부상(등짐장수)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에 1000여 개의 시장이 생겼는데, 이 시장들은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시장들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30, 60리 간격으로 섰기에 보부상들은 걸어서 장을 옮겨 다니며 장사를 했다.
낯선 동네를 떠돌아다니다 보면 산적들을 만나 장사 밑천을 빼앗기기도 하고, 병을 얻어 죽을 수도 있다. 보부상들은 처음에 3~5명 단위로 접장을 두어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의무 사항을 만들어 철저히 그것을 지켰다.
보부상들은 길을 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동료 보부상이든 일반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앞에 소개한 등짐장수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줄 수 있었던 거다. 만약에 보부상 가운데 죽은 사람이 있으면 장례를 치러 주었고, 장사 밑천이 떨어진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돈을 빌려 주어 다시 장사를 하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규율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매로 다스렸다. 불효를 저지르는 자는 곤장 50대, 웃어른한테 불손하게 대하는 자는 곤장 40대, 폭리를 취하고 남의 장사를 방해하는 자는 곤장 30대, 술·여자·도박에 빠진 자는 곤장 20대, 사발통문에 응하지 않거나 회의에 빠지는 자는 곤장 10대였다. 심지어 회의 시간에 옆 사람과 말을 하다가 걸리면 곤장 15대에 처했다.
이처럼 규율은 엄격했지만 보부상들은 서로서로 도우며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만나면 다음에 만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약속하고 서로 옷을 바꿔 입었다. 일심동체를 확인하며 형제 이상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동포(同胞)’, ‘동포애(同胞愛)’라는 말도 이러한 풍습에서 나왔다. 또한 보부상들은 모임에서 큰 바가지로 술을 돌려마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동료애를 다졌던 것이다. 요즘 술자리에서 벌이는 술잔 돌리기도 보부상들의 이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보부상들은 ‘사발통문’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면서요?
한말에 보부상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 큰일이 생기거나 보부상의 아내가 죽었을 때, 시장에서 보부상과 관청 사이에 시비가 붙었을 때 ‘사발통문’을 써서 연락하여 보부상들이 한꺼번에 모였다.
사발 주둥이에 먹을 칠해 백지 위에 찍으면 원이 생긴다. 그 원 둘레에 보부상의 이름을 돌려가며 쓰고 전달 사항을 적은 것이 ‘사발통문’이다. “사발통문이요!” 소리가 들리면 보부상들은 열일 제쳐 두고 곧바로 출동했다. 이들은 시골 구석구석 가지 않는 곳이 없어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는 파발마가 되어 서울에 알렸다. 동학혁명군이 공주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보부상들은 300리가 넘는 길을 30리마다 이어달리기 하듯이 달려 몇 시간 만에 서울에 그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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