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1 월간 제717호>
<4-H인의 필독서>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 ‘이별’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었다. 할 일이 없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았고, 가끔은 어른들 몰래 나쁜 짓도 했다. 햇살이 환하게 부서지던 그 날, 툇마루에 기대앉은 나는 팔랑거리는 노랑나비가 반가웠다. 좁은 집에 많은 식구들이 오글복작거리며 살던 가난했지만 사는 맛 넘치던 그때를 추억하면서 김주영의 자전적 성장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를 읽는다.
작가는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을 애틋한 심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참담함을 작가는 한 편의 소설로 아름답게 승화시켜 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들머리에 궁핍을 겪었던 시절의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주인공인 ‘나’는 세 살 어린 아우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집 너머에는 장터거리가 있어 닷새마다 한 번씩 장이 섰다. 장날에도 방아품을 팔러 다니는 어머니는 장날과는 상관없이 지냈다. 장날의 북적거림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장바닥을 누비며 상표 딱지를 줍던 나와 아우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툇마루에, 나와 아우는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와 아우의 진짜 적은 어머니 대신 버티고 앉아 있는 방 안의 어둠이었다. 품을 팔러 간 어머니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노복이네 어머니가 우리들을 돌봐줬다. 노복어멈은 술도가 품앗이꾼이어서 늘 고두밥 냄새가 났다. 술도가에는 상고머리에 허우대가 우람한 장석도라는 모꾼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장사인 삼손을 방불케 했다.
여인숙 모퉁이를 헐어내고 들어선 이발관에서 나는 뭐든 똑같이 복사해내는 거울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 본 거울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30대 초반의 이발관 주인은 시골사람답지 않게 말쑥한 옷매무새에 하얀 얼굴을 지녔기에 아우와 나는 그를 ‘거울의 주인’으로 불렀다. 나는 이발관 거울의 위쪽에 걸려있는 수채화 한 장을 발견한다. 달밤, 오솔길에서 남녀가 팔짱을 낀 채 걷고 있는 그림을 자세히 올려다보던 나는 어른들의 은밀한 세계를 훔쳐보았다는 쑥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조용한 교정에서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나에게 가다온 여선생님은 딱지 모양으로 접은 쪽지를 손에 쥐어 주면서 이발소 주인에게 몰래 전해 주라고 부탁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쪽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튿날 나는, 이발관 주인이 빨갱이란 명목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발소의 수채화 그림을 갖고 싶어진 나는 삼손에게 굳게 잠긴 이발소 자물쇠를 따달라고 부탁한 후 그림을 꺼내 항아리 안에 감춘다. 그 일은 나에게 엄청난 비밀을 지닌 것으로 느껴졌고 어쩐지 다른 아이들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로 삼손은 물론 어머니까지 경찰서로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열흘 뒤 풀려난 삼손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삼손의 떠남을 통해 나는 그 어떤 것이든 현재라는 시각에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확실하게 되돌려 놓을 수없는 것이 이별인 것을 아우와 나는 어릴 때 경험했다. 우리들과 한번 헤어진 이후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들이 즐겨 삼손이라 불렀던 장석도, 그리고 거울의 주인으로 불렸던 설영도, 잃어버린 편지의 주인이었던 최영순 선생, 그리고 내게 첫사랑을 보냈던 가난한 계집애 남순애. 그들 모두는 어느 날 내게 이별을 고한 뒤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아우와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건 옥화와의 이별이었다. 옥화는 아우에게 무거리떡을 나눠주곤 하던 여인숙집 딸이었는데, 내가 5학년, 아우는 2학년이던 해 초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옥화의 죽음 이후 툭하면 울던 아우는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세상과 부대끼며 아우와 나는 자라났고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재밌고 깊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청소년 자녀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부모님이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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