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 애 회원〈경남 창원시 봉림중학교4-H회〉
솔직히 과제발표대회 중 가장 기대했던 활동이 바로 도산서원 방문이었다. 난 이렇게 우리 조상님의 얼을 찾아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님의 유적들을 보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역시 이순신 장군님의 매력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번 역시 퇴계 이황 선생님의 지혜와 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퇴계 이황 선생님은 1501년에 태어나셔서 1570년에 돌아가셨다. 여러 번 과거에 급제하셨지만 인재양성을 위해 벼슬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시사단을 보러갔다. 시사단은 정조임금께서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지어주셨다고 한다. 가이드 선생님께서 안동댐이 있기 전에는 물이 많이 범람해 시사단을 높게 지었다고 설명해주셨다. 또 여기서 시험을 치러 총 11명이 뽑혔다고 한다. 여기서 뽑힌 사람은 벼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명예로 여겼다고 한다.
다음에는 옥진각이라는 곳에 갔는데,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뜻 깊은 유물 몇 가지를 봤는데 첫 번째는 투호이다. 천원짜리 지폐에 있는 투호의 실제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혼천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혼천의는 우주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황 선생님께서 실제 공부하신 책상을 봤는데 책상이 닳아 있었다. 그때 나도 이 생각을 했다. ‘나도 이렇게 책상이 닳도록 공부해서 우리나라를 알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곳에서 이황 선생님의 일화를 하나 들었다. 이황 선생님께서는 부인이 둘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부인은 아기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둘째 부인은 약간 정신지체가 있는 분이었다. 둘째 부인이 제사를 지내기 전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데 그만 먹어버려 주위 사람들이 거친 말로 훈계하자 이황 선생님께서 “산 사람이 중요하지 죽은 사람이 더 중요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인을 보호하셨다고 한다.
전교당이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여기서 한석봉 친필의 ‘도산서원’이라고 적인 사액현판을 볼 수 있었다. 이 현판은 선조 임금이 사액하셨다고 한다. 퇴계 이황 선생님께서 얼마나 현명하셨으면 임금에게까지 그 명성이 미쳐 최고의 문필자인 한석봉에게 시켜 사액하셨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곳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라고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 선생님께서 4년에 걸쳐 짓고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곳이다. 이곳에서 가이드 선생님께서 이황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해주셨다. 이황 선생님께서는 매화를 너무 좋아하셔서 항상 매화를 문 앞에 놔두셨다. 또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길러 문을 열고 감상하셨다고 한다. 퇴계 이황 선생님은 죽기 전 아침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이 대목에서 이황 선생님이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었고, 가슴이 찡했다. 나도 모르게 이황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농운정사이다. 농운정사는 퇴계 이황 선생님의 제자들이 공부를 하던 기숙사다. 퇴계 이황 선생님께서 제자들이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자 모양으로 농운정사를 짓도록 하셨다고 한다. 여기 앞에 담이 있는데, 지금은 담이 높지만 예전에는 낮아서 낙동강이 한 눈에 보였다고 한다. 담이 높아진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수하기 전에는 거지들이 먹고 자고 하던 곳이었기에,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담을 높게 보수했다고 한다. 또 문이 많았는데 채광 때문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밤에 공부하기 위해 호롱불을 이용했는데, 호롱불빛이 약해 달빛을 좀 더 받아 밝게 보기 위해 문을 많이 달았다고.
4-H를 통해서 이런 좋은 곳을 탐방할 수 있어 너무 좋았고,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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