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 격주간 제919호>
[이달의착한나들이] 정조의 성
-  경기 수원  -

연의 몸짓은 정조의 몸부림 같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요즈음 한적한 곳을 찾아 수원에 있는 화성 성곽길을 걸으러 갔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팔달문 뒤로 성곽길이 보이고 멀리 산 위로 서장대가 보였다. 나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성벽은 놀라울 정도로 높고 강해보이는 반면 길을 따라 휘어지는 모습은 물 흐르듯 유연하고 아름다웠다. 깃발이 나부끼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서장대! 나는 수원이 내려다보이는 서장대에 앉아 묵념을 하고 화성을 지은 위대한 성군 정조를 그리워했다.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천재로 어떤 학자도 그의 학문적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무예 솜씨도 뛰어나 직접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활쏘기도 50발이면 50발을 다 맞히는 신궁이었다. 의학, 문학, 과학, 음악에도 걸림이 없었던 천재! 그는 백성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세상을 만들고 과학과 선진문명 도입으로 생산과 발전을 촉진시키려 했던 선구자였지만 그의 앞에는 태산처럼 막아서는 노론벽파가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1살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벽파는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꺼려 결사적으로 막게 된다. 정조는 왕이 된 후에도 세 번이나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으며 가족이 차례로 죽어 나간다. 아들 문효 세자가 죽고 임신했던 의빈 성씨가 죽고 조카인 상계군마저 의문의 죽임을 당한 것이 불과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는 칼을 곁에 두고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두려워 죽고 싶을 뿐이라는 그의 일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태산 같은 노론벽파를 넘어서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규장각을 만들어 정약용 같은 인재를 배출하고 왕실 친위대인 ‘자용영’을 설치해 10여 년 동안 군사를 확충한다. 그의 소원은 당파를 없애고 왕과 백성이 직접 얼굴을 보며 소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축조한 성이 바로 화성이다. 정조 18년, 정약용이 거중기를 이용하는 등 10년 공사를 2년 반 만에 완성한 화성! 노론벽파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쓴 쾌거였다. 정조는 공사에 가담한 백성에게 임금을 지급했다. 그가 남긴 말이다. “내가 화성을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여유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백성들을 아프게 해서 성이 하루 만에 완공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절대 나의 뜻이 아니다.” 성이 완공되자 그는 화산 아래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킨다. 이제 때가 되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이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아 갈 모든 준비를 끝낸 것이다.
정조 24년 그는 조정 신하들을 모아놓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벽파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명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는 죽는다. 그의 나이 49세. 이것이 조선왕조 최대의 의문사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변혁의 시대, 우리 조선은 정조를 잃음으로써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200년이 지나도 애통하게 회자되는 것이다.
나는 서장대를 내려오다 나무에 걸린 연을 보았다. 연의 몸짓은 노론벽파를 넘으려는 정조의 몸부림 같았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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