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5 격주간 제913호>
[이달의착한나들이] 신을 이긴 사람

뿌리의 살이 바위를 파고 들어가 있었다.

북한산을 오르다 소나무를 보았다. 반쯤 쓰러지다 가까스로 멈추어 선 나무. 다가가보니 땅위로 올라온 뿌리가 커다란 바위를 휘감아 붙들고 있었다. 바위의 무게로 나무는 기울어지다 멈춘 것이다. 비바람치는 날, 강풍에 비명을 지르던 나무는 일촉즉발의 순간, 뿌리로 팔을 뻗어 바위를 붙들었을 것이다. 살려달라 애원하면서. 얼마나 초인적인 힘으로 붙들고 매달렸는지 뿌리의 살이 바위 속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나무는 푸르게 빛났지만, 매순간 고통스러워 보였다. 살다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은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다. 사는 것처럼 중요한 건 없으니까. 수많은 죄를 짓고도 신을 이긴 사람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다.
야곱은 원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형을 속여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고 형에게 쫓겨 삼촌 집으로 가게 된다. 삼촌 집에 살면서 삼촌의 딸들과 결혼을 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삼촌의 재산까지 빼낸다. 또다시 삼촌에게 쫓기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야곱은 거부가 되어 수많은 재산을 수레에 싣고 고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고향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곱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종들과 예물과 첩들을 차례로 형에게 보낸다.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하는 애첩과 아들 요셉까지 보낸 후 그는 홀로 남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된다.
그날 밤 야곱은 기도를 하다 천사를 만난다. 야곱은 천사를 붙들고 살려달라 밤새 씨름을 하다 새벽을 맞는다. 새벽닭이 울고 천사는 돌아가려 했지만, 야곱은 죽을힘을 다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자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쳐서 부러뜨리고 만다. 야곱은 절뚝거리면서도 요지부동, 끝까지 붙들고 살려달라 애걸하자 천사가 말한다. “내가 졌다. 넌 하느님하고 싸워 이겼다.” 신을 이긴 야곱! 신도 살겠다는 놈에게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세상에 또 다른 야곱은 많다. 지하철에서였다. 손잡이를 잡고 무심히 서있는데 꽈당!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남자의 머리가 내 발 아래 있었다. 그는 머리에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듯했고 주변엔 사연을 적은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학생이 구조 요청을 하려고 벨 있는 쪽으로 달려가자 그는 눈을 뜨고 결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그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쫓기듯 겨우 몸을 일으킨 그에게 사람들은 종이와 지팡이를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부딪치고 어찌 무사할 것인가? 나는 돈을 털어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 그의 뒷모습엔 죽음의 공포가 배어있는 듯했다. 그렇게 머리를 부딪히고 어찌 무사할 것인가? 제발 별일 없기를 속으로 빌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지나가며 나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또 한바탕 했군!”
날마다 살기 위해 죽어라 머리를 바닥에 박는 사람. 나를 속이고 내 돈을 가져간 사람. 그러나 소나무 아래서 깨달았다. 소나무는 바위를 붙들고 살고 그 남자는 나 같은 사람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걸.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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