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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5 격주간 제90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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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그리운 나의 4-H |
김 태 수 (1964년 안성군4-H연합회장)
모처럼 4-H신문을 받아보고 반가움은 말할 수 없을뿐더러 새삼스레 다시 보는 ‘4-H’에 그리움이 앞서는 것은 나이 먹은 사람의 센티멘털일까!
나는 1960년대, 그러니까 지금부터 근 60년 전 나의 청소년기를 4-H를 전부로 알고 4-H를 통해서 세상을 배웠고 사회를 알게 된 어쩌면 철저한 4-H인으로 청소년기를 살아온 매우 고전적인 4-H회원이다. 당시는 4-H의 본래 기능인 ‘교외교육’에 4-H가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은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하는 학생이 거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수의 청소년들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마지막으로 학창생활을 끝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정으로 돌아간 소위 ‘가사 돌보미’들에 대한 별도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여 4-H구락부의 교외교육 기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도시로 향하던 눈을 돌려 발밑을 보게 되었고 다행히도 농촌지도소 지소가 발족하는 시기와 맞물려 농촌지도소를 통하여 4-H와 접하게 되었으며 철저한 4-H인이 되어 마을 4-H회장, 면연합회장, 군연합회장까지 맡기에 이르렀고 1965년 경기도연합회장에 도전하였으나 보기 좋게 낙방하여 군 입대로 일단 4-H생활을 접게 되었다.
지금부터 60년 전이면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할 정도로 오래전 얘기라 당시의 제반 현실이 지금에 비하면 천양지차로 가난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탓에 열악하기 그지없어 발로 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학교4-H, 청년농업인4-H로 구분하여 운영하고 연령도 높지만 당시에는 주로 20대 전후의 청소년이 주축이 되어 입대 전까지 활동하던 시기였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4-H’ 두 글자가 눈에 확 띄고 반가운 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4-H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고 큰 영향력을 끼쳤나 짐작이 가는 얘기다. 당시를 뒤돌아보면 4-H란 내게 전부였고 삶의 중요한 방편이었다. 오죽하면 가을 경진대회 시기를 맞이하여 남의 논에 벼 베러 일가서 군연합회에 참석하겠다고 주인에게 양해 구하고 그 밤중에 30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 지도소에 나가 벼 베기로 고단한 몸을 이끌고 군연합회를 주관하지 않았나. 기동력은 전혀 없는 형편이라 순전히 도보로 군경진대회 독려 차 단위 구락부를 방문하고 배가 고파 남의 집 무로 고픈 배를 달래는 일도 왕왕 있었다. 네잎다리 크로바 정신이 좋아서 ‘나의 머리’로 시작하는 4-H서약이 흡족해서 아마도 나는 4-H에 미쳤었나보다.
지금은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고 발전했다. 손수레도 하나 없던 우리 집에 자동차가 네 대나 있고 꽤나 부유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니 참으로 편하고 풍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일련의 부유가 순전한 4-H의 공은 아니더라도 오래전부터 몸담고 정진했던 많은 4-H 동지들의 숨은 공과도 상당부문 작용했음을 상기할 때 가슴 뿌듯함을 느끼며 지금도 변함없이 열심을 다하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고 더욱 열심을 부탁하고 싶다.
오늘도 변함없이 4-H회와 사회와 우리나라를 위하여 4-H의 깃발을 힘차게 올려줄 것을 기대하면서 아주 오래된 4-H 선배가 회고기를 몇 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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