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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갈 땐 볼 수 없었던 글과 푸른 하늘. |
입원해 있는 친구를 만나고 근처에 있는 낙산에 올랐다. 아픈 친구를 만나고 산에 오르니 겨울나무가 보였다.
앙상한 나무들은 친구의 야윈 모습이 되어 나를 흔들었다.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잘 살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인사일지 모른다는 걸 우린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박혔다.
우리는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다. 삶 속에 선물세트처럼 끼워져 있는 죽음! 그 의미를 생각하며 걷다가 이화동 벽화마을에 이르러 눈이 환해졌다. 〈잘 살기 기념관!〉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니 그곳엔 마대복이란 분에 대한 보도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전시관을 둘러보다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잘 산다는 건 얼굴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찾아와 울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1964년 군대를 마친 마대복은 경희대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산동네 불우한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연다. 당시 부모들은 먹고 사는 게 지상과제였으므로 아이들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청년은 교실이 여의치 않으면 골목 흙바닥 가로등 밑에서 가르치고 비가 오면 자신이 손수 지은 비좁은 흙벽돌집에서 방문을 열어놓고 가르쳤다. 수업료도 없었고 분필 등 많은 것이 필요했기에 그는 십여 년간 구두닦이를 계속한다. 그가 지은 학교 이름은 〈잘 살기 학원〉. 그 학원에서 배출한 학생 수는 22년 동안 3,600명에 이른다. 그는 말한다. 잘 산다는 건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사는 거라고. 이 모든 건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돈이 없어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마대복은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숯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 배운 게 대마초. 엄마가 그걸 알고 매질을 하자 어린 마대복은 울면서 말한다. 학교에 보내주면 대마초를 끊겠다고. 그 후 엄마는 가족 중 마대복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산동네서 천막을 치고 나물장사를 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하던 그녀는 세 번 삭발을 한다. 첫 번째는 보름 동안 내린 비로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을 때 삭발을 해서 밥을 지어 먹였고, 두 번째는 겨울날 물을 길어오다 미끄러져 팔이 부러진 마대복이 도둑질하는 친구에게서 만 오천 원을 빌려오자 엄마는 “가난해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당장 돌려주고 오너라!”라고 호통을 친 후 머리를 잘라 병원비를 내게 된다. 세 번째는 1965년 골목에서 수업하지 말라는 주민들의 항의로 집에서 수업을 하느라 양식이 떨어졌을 때 삭발을 한 그녀는 담담히 말한다. “아들아 넌 지금 큰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난 글도 모르지만 그게 얼마나 큰 설움인지 안다. 늙은이가 머리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냐!” 그러나 내가 눈물이 났던 진짜 이유는 마대복이 그녀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내 친구도 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은 아니다. 어쩌면 친구는 나에게 잘 죽기 위해 잘 살라고 말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가면 계단을 내려갈 때 없던 글이 올라 갈 때는 보인다.
“잘 살기란 뭘까요? 어머니! 어머니!”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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