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1 격주간 제866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 (44)

세계 농민들 농업기술 발전과 우의증진에 멍석을 깔다 (2-2)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만경생은 초기 IFYE 프로그램 매개자로서 또한 업무 집행 책임자로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사업추진 첫 단계에서는 자금조달과 사업자체에 대한 관련기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득과 접근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당시에 ‘한국인들의 해외진출’이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여권 발급은 어머니 뱃속에서 완전무결한 국민으로 재탄생하는 것과 같이 어려웠던 원시시대였다. 관계부처 인사들 반대에 대한 설득 또한 산 넘어 산이었다.
당시 자주적인 한국 4-H클럽운동은 팽창하기만 했다. 전국 회원 수는 70여만명을 초과하는 대전환기였다. 매혹적인 4-H/IFYE사업은 만경생으로 하여금 강한 집념과 사명감을 갖게 하여 1963년 본격적인 4-H/IFYE사업으로서 미국과 대만을 대상으로 교환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사실 1960년대는 우리 국민들의 해외여행이란 꿈속에서나 맛볼 수 있는 폐쇄시대였다. 일부 고관들 자제와 호의호식하는 특권층 자제들만 해외유학(주로 미국)을 목적으로 여권 발급이 가능할 때로서 농촌 아이들·농사꾼들에게 여권을 교부한다는 것은 우리 집 헛간의 소도 웃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 4-H/IFYE 선발생들에게는 여권 발급 자체가 또 하나의 어려운 관문이었다. 신원 조회는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4-H협조위원회의 IFYE 해외파견 요청을 농진청, 농림부를 경유한 후 외교부에 신청해야만 하는 복잡한 행정적 절차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한국 첫 4-H/IFYE/미국 파견생 2명은 1963년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미지의 세계로 진출할 역사적 문호가 활짝 열렸던 순간이었다. 이들 두 명의 한국4-H 출신이 당시 유일한 외국 연결 항공편이었던 Northwest Air-line 편에 탑승하여 끝없는 저 푸른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 만경생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은 4-H/IFYE사업을 최대한 국내에서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관리였다. 막대한 4-H 지원 정부 보조금과 귀중한 4-H협조위원회 지원금을 투입, 험난한 절차를 밟으면서 연간 8명(한국 4명, 외국 4명)의 극소수 4-H/IFYE대표를 상호 교환하는 투자를 생각할 때, 이에 대비한 국내의 가시적인 회수책(보람을 회수하는 방안)과 그 효율성 문제가 만경생에게는 최대로 부과된 과제였다.
소수 4-H/IFYE 대표들에게서 최소한 백배, 천배의 투자금에 대한 수익성(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우리 4-H를 위해 적극 전파)을 찾아내야만 했다. 즉 올바른 4-H 지도체제, 영농기술, 4-H클럽 회원들 활동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과제(토양 보존, 각종 식량 다수확, 대/중/소형 가축의 위생적 사육과 우량종 사육 및 증식, 4-H 회의 진행, 지역 행사 등) 촉진과 여회원들의 식량 보존, 통조림 가공, 육아, 영양개선 방안 도입 등 제반 문제 해결을 촉진할 활동 방법 등이었다.
4-H/IFYE사업이 단순한 선진 농업국 시찰(관광이나 공짜 구경)이 아닌 실제 경험한 체험을 귀국 후 우리 4-H 발전을 위해 100% 재생산하도록 공헌하라는 활동에 대한 구상이다. 이런 새로운 후속 조치로서 우리는 치밀한 Follow Up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했다.
IFYE 해외 파견생들에 대한 적절한 사전 오리엔테이션, 외국 교환생 입주 농가와 해당 지역 농업기술센터와의 긴밀한 협의 하에 외국 초청생들에 대한 한·영문으로  된 활동 일정표 작성, 언어소통 지원, 농가 보조금 제공, 보안과 식생활, 건강 유지책, 비상사태 발생 시 연락계통 비치 등이었고, 외국 교환생들을 가급적 지역 내 행사와 집회, 장터, 학교 방문 강연, 4-H행사 등에 참석시켜 외국4-H 활동과 농업지도사업 활동 등을 홍보하도록 유도하여 4-H의 국제적 유대성과 한국 농촌도 세계 농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렸다. 또 지역 내 역사적 명소 견학과 가급적이면 우리 고유의 역사 풍속 등을 접하도록 하여 국제적 우의 증진에 노력했었다.
한국 교환생들은 귀국 후 사후관리로서 국내에서 개최되는 4-H행사, 농민 집회, 학교 등을 방문하면서 외국 체험을 직접 홍보하는 동시에 중앙 및 지방 매스컴과 서울 KBS-TV에 국내외 교환생들과 합동으로 매년 출연시켜 4-H/IFYE의 확대 및 홍보에 노력한 바 있다. 물론 중앙 3대 신문사 좌담회는 연례행사로 취급된 바 4-H클럽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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