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스스로를 새롭게 혁신하고 또 새롭게 개혁하라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 《대학(大學)》 중에서
중국 고대 상(商)나라를 창건한 탕왕(湯王)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첫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탕왕이 몰아낸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대대적인 조경용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고 자신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나라의 제후로 있던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격파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왕의 자리에 오른 탕은 세숫대야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아홉 글자를 새겨 넣고 세수할 때마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새롭게 변화하려는 다짐을 늘 일깨웠다. 그에게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날마다 스스로를 새롭게 혁신하고 또 새롭게 개혁하라’는 글을 가슴깊이 새긴 것이다.
스스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탕왕을 성군으로 만들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이 있는지 반성하고 새롭게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타인을 선(善)으로 이끄는 정치를 펼친 것이다. 세금을 줄이도록 제도를 고치고 억울한 세금을 경감하게 하여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탕왕도 가뭄이라는 자연의 재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농사가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농업국가에서 가뭄은 전쟁과도 같은 피해를 주는 큰 재앙이었다. 가뭄이 이어지자 탕왕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목욕재계하고 머리를 자르고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 기우제를 올리며 반성문을 낭독했는데 그 반성문은 다음과 같다.
“정치가 한쪽으로 기울었나요? 백성들이 직업을 잃었나요? 궁궐이 너무 화려한가요? 측근의 청탁을 들어줬나요? 뇌물이 횡행하고 있나요? 진실을 왜곡하여 어진 사람들이 궁지에 몰렸나요? 그렇다면 모두 제 잘못입니다. 반성하고 고쳐나가겠습니다. 그러니 비를 내려주소서!”
탕왕의 반성문 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렸다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록되어 있다. 탕왕의 반성문은 조선의 왕들에게도 이어졌다. 가뭄이 이어지면 왕들은 어김없이 기우제를 올렸고 기우제에서는 탕왕의 반성문을 낭독했다.
1636년(인조 14)부터 1889년(고종 26)까지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낸 것에 관한 기록을 예조에서 모아 편찬한 ‘기우제등록(祈雨祭謄錄)’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기우제는 왕실의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 특히 효종(1649년 즉위)부터 현종(1674년 퇴위) 사이의 가뭄은 더욱 극심했다. 6년 동안 가뭄이 연속으로 일어난 적이 두 번이나 있을 정도였다.
“임금(효종)은 머리 위에 작은 종기를 앓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침 중병에 걸려있던 세자(현종)를 돌보느라 자신의 종기에는 무관심했다. 또 때마침 전국에 비가 오지 않아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는 대궐의 뜰에 나가 직접 기우제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종기의 독이 얼굴까지 퍼지는 등 위독해졌다.”(효종실록 1659년 4월 27~28일)
기우제는 늘 비를 내리게 하는 것에 성공했는데 그 비결은 간단했다.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정성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효종실록’에 나온 대목처럼 효종은 기우제에 매달리다 자신의 종기를 치료하는 시기를 놓쳤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키워드는 두 가지다. 매일 스스로를 혁신하는 것과 그것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가뭄을 이겨내는 비도 내리게 할 수 있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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