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알면 반드시 행동으로 연결된다
知行合一(지행합일)
- 《전습록(傳習錄)》 중에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그런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라고 선배들은 우리에게 충고해준다. 말은 아는 것이며 행동은 아는 것의 실천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불일치는 일부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처럼 어려운 일을 왜 선배들은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야 정확한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지식에는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지식과 행동이 각각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A에는 반드시 B가 따라야 한다’ 혹은 ‘A와 B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인식하는 게 바른 것일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문장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중국 명(明)나라의 학자인 왕수인(王守仁, 1472 ~ 1528)이다. 호가 양명(陽明)이므로 왕양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자의 학문을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처럼 왕양명의 학문을 양명학이라 부른다. 왕양명의 학문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주자학은 ‘하늘의 이치가 나의 본성(天命之謂性)이 되므로 내가 지닌 본성이 하늘의 이치다(性卽理).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삶이 바른 삶이다(率性之謂道)’라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우주만물의 이치를 내가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양명은 ‘성즉리(性卽理)’를 ‘심즉리(心卽理)’로 바꿔버린다.
주자는 세상의 온갖 것들을 열심히 공부하면 하늘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이치가 나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설파하지만 왕양명은 하늘의 이치가 따로 있어 그걸 내가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내 마음에 그게 있으므로 주자가 이야기하는 번잡스러운 과정은 생략되어도 된다고 말한다. 실용적인 논리를 세운 것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독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지방에 권한을 많이 주다가 결국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당나라에 이어 중국을 지배하게 된 송나라는 중앙의 권력 강화가 나라를 유지하는 필수요소라고 파악했다. 송나라 사람인 주자가 하늘의 뜻(天命)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명나라는 달랐다. 중앙정부가 세금을 늘리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입이 중요했다. 아무리 하늘의 이치가 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해도 이미 ‘하늘’이라는 단어가 지닌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힘입어 왕양명은 구태의연한 ‘하늘’을 삭제하고 각 개인의 마음에 집중한 것이다.
결국 왕양명이 주장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지(知)와 행(行)은 하나다’라는 뜻이며 “제대로 알면 반드시 행동으로 연결된다”로 번역해야 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 것과 실천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늘의 뜻이 있고 그걸 내가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아는 것과 행동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된다. 이미 하나인데 무엇을 맞추려고 노력하겠는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딱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그대로라고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고 더 열심히 내 양심에 귀를 기울이자.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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