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1 격주간 제856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 (34)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탄생 <5>
- 폭풍에 시달린 클로버 4-H 깃발! -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원대한 희망을 품고 발족한 중앙위원회 탄생은 순조로웠다(△고문 신중목(전 농림부장관), 앤더슨(전 미 경기도 군정지사) △이사장 김형민(전 서울시장, 전 삼일사 사장) △부이사장 공진항(전 농림부장관), 전택보(천우사 사장) △감사 김영환(동양방직사장), 서정익(전 동방사 사장) △총무이사 김웅각(전 기획처 경제계획관) △이사 윤영선(전 농림부장관), 함창희(동림산업 사장), 김인태(존 민의원 전문위원), 이대위(유한모터스 부사장), 이사 조인섭(천일백화점 사장), 김용완(경성방직 사장), 홍재근(한국생사수출조합장), 한석진(대한제분 사장), 김동성(초대 정부 홍보처장, 국회부의장)).
하지만 사무실 마련과 한 달 후에 개최될 제1회 4-H중앙경진대회 예산 조성(참가자 60여명의 여비와 3일간 숙박비는 중앙위원회와 농림부 50%씩 분담, 한미재단은 시상품, KCAC는 서울시내 견학과 교통편 지원)과 중앙4-H실무회의 참가로 김웅각 총무와 김예양 간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만경생의 협조는 더욱 긴밀해졌다. 김총무와 농림부 4-H담당 실무자들은 4-H업무 전반에 아직 미숙했다. 많은 혼선이 야기되었지만 그나마 경진대회를 무사히 완수하게 된 것은 그들의 협조가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전국4-H경진대회(최초)는 각계의 협조와 지원으로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전국 농촌청소년들에게 의욕과 자부심을 힘차게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도시사회와 벽지 농촌지역사회에도 큰 바람을 일으켰다. 고집불통인 이승만 대통령도 기뻐했다(한미재단 후원에 감사를 표함). 정부 관계 요로와 국회의원들도 농사교도사업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첫 4-H 중앙(전국) 맛보기 행사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우리 4-H중앙 실무자들은 크게 힘을 얻었다. 감동적이었다. 내년에는 좋은 것을 더욱 좋게 하겠다고 서로 다짐했다.
공식적인 4-H운동은 1952년 정부시책으로 채택되었고, 1953년 9월 정부가 환도한 후 경기도를 비롯하여 경남 및 그 밖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한미재단의 후원과 KCAC의 기술원조와 아울러 사회 유지와 독지가들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발족한 중앙위원회 활동은 국민적 기대가 엄청났다.
당시 중앙위원회 이사진으로 참여한 분들 중 사회적 명성이 후덕한 분들은 돋보이는 그들의 신분을 최대한 발휘하여 중앙위원회 위상을 높이기에 노력했고, 사업가들은 강력한 재정적 지원으로 한국4-H운동 발전에 봉사하기를 공동으로 언약했다.
이들 초대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 임원은 어려운 초창기에 물심양면으로 우리 4-H를 사랑했던 분들이다. 참가 회원 약 130명 중에서 선임된 분들이다. 1956년 7월 제2차 이사회에서 임원 약간명을 선출하여 회장에 고재봉(서울특별시장, 후에 청와대 비서실장), 부회장에 전 농림부장관 윤영선, 동 정운갑, 최남규 교통부장관, 정준모 보건사회부장관 등 현직 장관급을 보선한 것은 중앙위원회를 강력하게 육성하여 4-H를 거국적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중앙위원회 창립시 정관은 총 6장 31조로 제정되어 오늘날까지 18회의 수정 개정을 가하여 명칭도 중앙위원회 → 4-H연맹 → 새마을4-H구락부 → 새마을청소년회 → 4-H후원회 → 현 한국4-H본부로 타의에 의해 여러 번 개칭 당하는 고역을 겪어 왔다. 1958년 1월 첫 법인 대표는 윤영선 명의로 등록된 바 있다. 법인등기가 창립 후 3년이나 경과된 것은 김웅각 총무의 불찰이었고, 1957년 11월 OEC 농협정책자금 6만불 4-H과제지원금으로 중앙위원회에 방출토록 만경생이 조치했으나, 사업계획서 제출 지연으로 일부만 방출, 당시 법인등기부등본이 필요하여 이 때 등기됐다.
1954년 말부터 1960년까지 중앙위원회 사무실은 무려 7번이나 이동했다. 만경생은 정말 안타까웠다. 가는 곳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 빼!’를 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시급한 사무국(사무실) 설치와 재정적 확충을 제1과제로 수행하려 했으나 당시 김웅각 총무는 농업계에 이름이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고, 과거의 제자들이(전국 각 시군, 시도 요직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업자(농업계통사업)들의 이권을 얻기 위해 항상 주변을 맴돌았다. 동시에 김총무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업자들의 이권을 알선하면서, 4-H지원금 연출과 사무실 제공을 교환 조건으로 수용했으나 그들의 요청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는 지원금 제공은 물론 사무실 무상 대여도 동시에 물거품이 되었다. 아쉽게도 여기서 ‘방 빼!’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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