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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서랍은 열려 있었고 가격표는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
어느 저녁 왕십리역에서였다. 9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모자까지 쓴 깔끔한 옷차림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철은 공짜지만 버스를 타려면 돈이 필요한데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 얼마면 되냐고 했더니 천 원만 달라고 했다.
나는 이천 원을 할머니에게 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내가 돌아서자 다른 사람을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내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서있자 지나가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 할머니 여기 자주 와요!” 왠지 그 목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남을 도울 때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지하철 안이나 길에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작은 도움이나마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나를 어리석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속이고 속는 세상에선 남을 돕는 일도 만만치 않다. 도와주고도 바보가 되고 때론 그들의 거짓을 부축이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나 세상엔 남을 속이려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도움을 받으면서 감동을 주는 이들도 있다. 휠체어를 타고 껌을 파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돈만 드리려고 했더니 할머니는 끝까지 껌을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의 몸은 장애가 있었지만 눈빛은 맑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날 껌 한 통 값으로 삶의 당당함을 배웠다.
올봄 충남 태안에 있는 ‘솔향기길’로 트레킹을 간 적이 있었다.
그 길은 2007년 유조선 기름유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원 봉사자들의 원활한 방제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당시 바다를 뒤덮었던 기름을 제거하려고 전국에서 130만여 명의 사람들이 달려왔던 것이다.
몇십 년이 걸려도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태안반도가 그들 덕분에 몇 년이 안 돼 다시 휴양지로 살아났고 푸른 바다가 꿈결처럼 내려다보이는 이 숲길도 유명한 트레킹 코스가 되었다.
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솔향기 가득한 길을 걸었다.
결국 인간이란 보이지 않아도 그물처럼 얽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솔향기길은 오르막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10.2km 길이다. 가져갔던 생수는 바닥이 났고 입이 바짝 타들어 갈 즈음 길가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작은 매점! 우리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며 매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주인이 없었다. 그 대신 칠판에 ‘무인매점입니다. 가격을 참조하시고 돈은 서랍에 넣어주세요’라고 씌어있었다. 돈서랍은 열려 있었고 가격표는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 한적한 산길에 무인매점을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의자에 앉아 다시금 칠판을 읽어 보니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또 오고 싶은 곳’ 등등 다녀간 사람들의 사연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맥주를 외상으로 먹고 간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매점에서 남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받은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어졌다. 남을 의심하고 망설이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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