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5 격주간 제855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 (33)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탄생 <4>
 - 냇가에서 용이 탄생하다! Happy Birthday! -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1954년 여름부터 추진해 오던 중앙위원회 창립준비위원회 전체 회의는 농림부 대표, KCAC, 한미재단 그리고 전형된 임시 임원들을 KCAC 회의실에 모시고 제반 안건(안)을 최종적으로 심의 결정했다.
중앙위원회 창립총회 날짜는 11월 9일 오후 2시, 장소는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소회의실에서 개최키로 하고, 추진위원장(임시의장 김동선, 앤더슨, KCAC 식량농림국장 Hymmar 박사) 공동명의로 초청장 약 200매를 발송했다. 참석한 인원은 약 120명과 도내 신문기자 20여명이 참석하여 미래 한국 4-H운동을 축복해줬다.
이날, 김동선(전 민의원 부의장)의 개회선언과 중앙위원회 창립 목적 및 취지를 설명한 뒤 앤더슨, 한미재단 한국사무소장 Dr. Ho Brooks의 축사와 한국4-H운동 지원 언약과 뒤이어 농림부 장관 윤건중(尹建重), 대독 이기홍 교도과장의 축사가 있었다. 임원 선출에서 고문은 신중목(愼重穆, 전 농림부장관)과 앤더슨, 이사장 김형민(金炯敏, 전 서울시장, 삼일사 사장), 부이사장 공진항(孔鎭恒, 전 4대 농림부 장관, 서울 정릉에서 사슴농장 경영), 농업전문가 전택보(全澤珤, 천우사 사장), 이사에 윤영선(尹永善, 전 농림부 장관) 외 17인을 이사로 선출, 초대총무에 김웅각(金雄珏, 성환중앙종축장, 경제기획처 심의관)을 지명했다. 만경생은 희망 반 걱정 반이었다. 오로지 4-H 민간단체로서 성공만 바랬다.
며칠 후 김 총무가 인사 겸 향후 업무에 대한 협의차 만경생의 사무실을 찾았다. 우리는 중앙위원회가 조속한 시일 내에 재정적(운영비) 자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보관하고 있던 추진위원회 관련 서류와 모든 회의록, KCAC가 발행한 각종 4-H 관련 인쇄물(4-H 조직과 운영, 과제 안내서, 각종 행사설명, 보상과 표창 그리고 농사교도사업에 관한 책자 등)도 함께 참고하도록 전달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비교할 부분이 있다. 1921년 미국 중앙위원회 (창립 당시 명칭 National Committee for Boy’s and Girl’s Club Work) 이사진들 직업 구성이 한국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윤영선 전 장관을 포함 전직 장관 3명과 기업가 15명이 참여하였고, 미국은 전 농무(USDA) 장관 Des Moines 출신 E.T.M eredith(농업 잡지 출판사 경영) 이사장 외에 각 주 출신 고위직 공무원과 사업가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총무(사무국장)는 G.L.Noble(Iowa대학교 낙농학, 농장, 목장 등 경영, Armour사 직원으로 있을 때 4-H 지원사업 봉사) 이었는데, 중앙위원회 발족 직전 Club 회원들 과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연방정부(중앙, Federal)에 청소년 Club 활동 지원부를 설치하는 것에 협조함과 동시에 미국 중서부 농촌 청소년들에게 과제 지원금 20만 달러를 보조하는데 노력했던 그는 다이내믹한 인물이었다.
우리 중앙위원회 초대 김웅각 총무는 당시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용모가 뛰어나고 호걸스러운 면이 많았다. 김 총무는 광복 전 수원농고 교수로 다년간 한국의 젊은 농학도와 미래 농촌 지도자 육성에 헌신하신 ‘한국의 덴마크 농업 개척자 그룬디비’에 비유할 만큼 우리 농업계와 농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만경생과 김 총무와의 첫 만남은 중앙위원회 발족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 만경생과 근 10년 가까이 접촉이 빈번했다. 첫 5년간은 일심동체로 지방 순회 강의(주로 농대, 농고, 정부기관과 공사 집회)를 함께 다니면서 4-H운동 초기 계몽에 동고동락했고, 각 시·도 및 지방 4-H경진대회 참관, 단위 구락부 방문 등을 통해 현장 활동을 격려한 바 있다.
김 총무는 과거 다년간 교단생활과 공무직에 봉사한 까닭에 ‘돈’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그뿐 아니라 김 총무의 주변에는 항상 ‘일확천금’을 꿈꾸는 간상배들이 따라다녔다. 이것이 김 총무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김 총무에게 수차례 문제가 발생했다. 마음씨가 고운 분이라 쉽사리 속았다. 몇 차례의 사무실 이전도 이에 기인된 것이다. 이권이 실패하면 ‘방 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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