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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격주간 제85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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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 (31) |
한국4-H구락부 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탄생 〈2〉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본론에 들어가기 전 당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야기 몇 가지를 기술하겠다. 4-H와 민간지원단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우리나라 4-H 초창기(1960년대 초까지) 많은 식자들의 4-H구락부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무척 심했다. 우선 4-H구락부란 명칭에 불만이 많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4-H가 무엇이냐?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명칭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상록회, 흥농회, 부농회, 농촌진흥회 말이야.”
당시 우리 국민정서는 배타주의에 쉽게 감정을 노출시켜 이에 대한 이해 접근에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다.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중앙위원회 명칭이었다.
“왜 미국식만 따르려고 하느냐?” 하며 ‘중앙’이라는 호칭에도 극한 반발을 야기한 바도 있었다. 당시의 한국에서는 ‘중앙’이라는 용어는 중앙집권제도를 상기시켜 비민주적이란 해석이었고, 하향식(下向式) 조직으로서 정치적 냄새가 풍긴다는 것이었다. 당시 자유당의 부정과 비민주적 정치와 연결시켜 하는 말들이었다. 이런 풍토에 대해 4-H는 비정치, 비종교, 비영리(3비) 단체라는 것을 넌지시 던져 주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인사들은 4-H운동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갖고 명칭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890~1920년대까지 여러 지역에서 각 지역의 농산물 생산 특성에 따라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농촌학습 과제 구락부를 조직하고 소녀들은 가사, 통조림 구락부 등을 구성하였다. 명칭(주·중앙 정부·농과대학 등)은 이를 단순히 ‘농촌 청소년들 구락부 활동’(과제활동으로서 The Boys and Girls Club Work) 이라고 서로 부르기 시작, 그 후 ‘3-H구락부’ 등 자율적 명칭으로 활동하다가 정부와 농과대학(농사교도사업 실행) 등에서 공식으로 4-H구락부라 공인한 것은 1935년이다. 이에 앞서 1914~1923년 미국 농무성, USDA의 연방정부 관보 제348호와 제85호에 ‘4-H구락부’ 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4-H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사회실천교육을 ‘과제활동’이라는 기본원리를 채택함으로서 점차 사회 유지들의 탄력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미국 농무성에 기록된 4-H구락부 회원 증가 통계가 아래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미국 농촌 전역에서 4-H구락부 활동이 합리적인 실천 교육으로서 그 적응성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는가를 우리들에게 여실히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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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H회원 증가 추이(1950~1986년)
주1) 1967년 회원연령 10~20세를 13~24세로 조정, 회원수 증가
주2) 한국은 회원 100만명 초과하는데 40년이 걸렸고, 이후 압축경제성장으로 4-H회원수는 격감하게 됨. |
1920년부터 15년간 미국 4-H구락부 회원수는 5배로 증가하였음을 본다. 미국의 1920년대와 한국의 1950년대 말까지 양국 농촌은 어딘가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양국의 잠재적 농업 발전의 원동력은 희망적이었던 것이라 단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1945년 이후와 한국 농업의 1970년 이후의 농업사를 보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4-H구락부 운동이 바로 그 답이 아니겠는가.
그 사례를 아래의 한국 4-H회원들의 성장 기록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4-H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정부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국가·사회의 미래 가치를 위해 농촌청소년들 중심의 실천적 사회교육 운동체(비제도권교육)인 4-H구락부의 육성 및 후원을 강력히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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