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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1 격주간 제8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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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탐방] 4-H에서 기른 리더십으로 의정활동 통해 농업발전 힘써 |
유 용 근 지도자 (한국4-H본부 고문 / 한국4-H원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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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향축4-H구락부, 초대 삼괴4-H연합회, 초대 화성군4-H연합회, 초대 경기도4-H연합회장을 거쳐 10대, 1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유용근 한국4-H본부 고문은 의정활동을 하며 농업·농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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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4-H운동 지난 70년의 역사상 가장 큰 성과는 청소년들의 가슴에 4-H이념을 심어줘 지역사회와 국가의 지도자로 키워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4-H를 통해 봉사정신과 리더십을 기른 4-H인은 450여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4-H의 소중한 별들이었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큰 빛을 발한 유용근 한국4-H본부 고문(78·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멱우리)을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 있는 한국농어촌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후계자육성기금 조성 토대 마련
유 고문은 현재 한국농어촌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연구소는 유 고문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1980년도에 설립됐다. 당시 유용근, 김원기, 허경만, 김동욱, 김현규 등 5명의 국회의원이 발기인이었다고 한다. 농민운동가인 이상기 씨가 이사장, 김정섭 씨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20여명의 국회의원과 10여명의 교수들이 조찬간담회와 농업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갖고 농업정책을 수립했다. 당시 함께했던 대표적인 교수로 역시 4-H출신이자 후에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김성훈 교수가 있었다.
당시 국회는 농수산위원회가 가장 인기 있는 상임위원회였다고 한다. 따라서 실력 있는 국회의원이 많았다. 재선 의원이었던 유 고문은 농업과 농촌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그 중 하나가 농어촌후계자육성기금을 조성한 것이었다. 1980년 국가보위최고위원회 주도로 부정축재자의 재산 환수가 있었다. 이것을 재원으로 유 고문은 농어민후계자육성기금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섰다. 이를 기반으로 후에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의 전신인 전국농업인후계자협의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마을부터 중앙까지 초대회장만 역임
유 고문은 4-H의 발상지인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풀 베고 소꼴을 먹이는 게 일상이었다. 밤이 되면 “빨리 불 끄고 자라.”는 부모님 성화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6년 동안 상장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학교를 가기 위한 국가고시를 앞두고 20여일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시험보기 전날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 판탄면으로 갔다. 이때 처음으로 전깃불을 봤다고 한다. 여관도 없어서 남의 사랑방에 20여명의 아이들이 함께 잠을 잤다. 아이들이 밤새 들락날락하는 통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유 고문이 경기도 1등을 차지했다.
유 고문은 유학의 길에 올라 성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향축4-H구락부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야학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환경정비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때까지는 단위마을로 4-H활동을 펼쳤는데 4-H회원들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연합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유 고문은 1962년 2월에 우정면과 장안면을 합친 삼괴4-H연합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4월에는 경기도4-H연합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 10월에 열린 전국4-H경진대회에서는 각 지역에서 온 연합회장이 모인 연합활동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 경진대회에서 대학4-H연구회연합회장을 맡고 있던 김준기 전 한국4-H본부 회장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처럼 유 고문은 마을단위에서부터 중앙까지 4개의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리더십을 길렀다.
4-H활동을 통해 농촌사회 발전에 힘쓰고 있던 유용근을 눈여겨보며 격려한 사람이 있다. 바로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유석창 박사였다. 그분의 권유로 건국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또 농민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신효당 선생도 유 고문이 더 큰 일을 할 그릇으로 성장하는데 멘토가 되어 주었다.
야당 당직자에서 국회의원으로
청년 유용근은 농민신문사 정치부장과 한국농민회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다. 화성군 475개 마을에 모두 4-H회를 조직하고 활성화를 이끌었던 그였다. 이를 바탕으로 농업과 농촌 발전을 위해 3000명의 회원을 모아 농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출마연령인 만 25세에 생일이 모자랐다. 대신 그 지역에서 출마한 김형일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추진하려던 집권 공화당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6.8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말았다. 유 고문은 한창 4-H정신으로 정의의 피가 끓어오를 때였다. 화성군청이 수원시에 있었다. 그는 수원 남문에서부터 북문까지 농지회 회원을 이끌고 행진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조직적인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정치권은 불끄기에 나섰다. 법원에서 당선시정요구서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대법원 판결 없이 재검표가 이뤄진 유일한 사례였다. 재검표 결과 당연히 당락이 바뀌었다. 이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유 고문은 제1야당인 신민당의 당직자로서 길을 걷게 되었다.
유 고문이 청소년시절부터 4-H에서 기른 덕목과 리더십은 그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 늘 겸손한 자세, 동료들과의 친화력은 4-H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유 고문은 당에서 인정을 받아 중앙상무위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마침 김형일 의원의 유고로 공석이 된 수원-화성선거구에 10대 국회의원 공천신청자는 12명이나 몰렸다. 중앙일간신문사 사장 출신부터 유력인사들이 즐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고문은 당의 공천을 받아 38세에 당당하게 국회의원의 배지를 달게 됐다.
유 고문은 11대 국회의원까지 지내며 한국농어촌문제연구소를 통해 올바른 농업정책 수립과 농어민의 권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4-H출신으로서 늘 4-H에 관심을 갖고 모든 활동에 참여해왔다. 지금은 한국4-H원로회장을 맡아 원로4-H인들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힘쓰고 있다. 한국4-H운동 70주년을 맞는 올해 4-H리더십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4-H를 빛낸 유용근 고문에게 박수를 보낸다.
〈조두현 사무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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