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1 격주간 제850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목적이 없는 위대함

"방향을 미리 정하지 않아야 학문이 넓어진다
博學無方(박학무방)
- 《소학(小學)》 중에서"


“내가 예전에 동안(同安)이라는 마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소리가 한 번 울리면 내 마음이 먼저 달려가 그 다음에 울릴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소리 하나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 종소리를 향해 달려갔다는 뜻이다. 이때에 나는 깨달았다. ‘지금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서둘러 다음을 기대하고 먼저 미래를 기웃거리면 안 되는 것이로구나! 지금 현재에 충실해야 그 다음도 있는 것이로구나!’”
송나라의 대학자인 주자(朱子)의 고백이다. 주자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공맹(孔孟)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을 지닌 많은 학자들의 논리와 철학까지 더해 화학적 결합을 이루었고 이를 집대성하여 새로운 탑을 세웠다.
그렇기에 그의 학문을 그 이전과 구별하여 신유학(新儒學)이라 부르거나 주자학(朱子學)이라 독립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자와 맹자에 얽매여 있던 유학(儒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을 유학(儒學)의 순수한 결정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유교 이외에 불교와 도교도 공부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을 신유학이라 하는 이유도 공자와 맹자의 학문에 도교와 불교의 이론을 가미해 보충했기 때문이다.
14세 때 아버지가 죽은 후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으나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호와 정이 형제의 학문에 몰두하고 이를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했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그의 학문은 유불선의 종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위학(僞學:거짓 학문)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며 수많은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80여 종의 책을 저술했다.
주자가 유학(儒學)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학(儒學)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공자와 맹자의 것만을 금지옥엽으로 알고 거기에만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론과 철학과 생각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고 다가갔다. 스스로 전체를 다 이해하기 전까지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고정관념을 배제했기에 많은 학자들의 생각과 철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로 주자와 평생 동안 대립하며 논쟁을 벌였던 육상산(陸象山)이 있었지만 주자는 육상산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철저한 학문적 파트너로 그를 인식하고 예우했고 그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가다듬었다.
육상산에 대해 편 가르기 식으로 비난을 하는 제자들을 불러 꾸짖을 정도였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주자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는 정신, 이것이 바로 ‘일정한 방향을 미리 정하지 않아야 학문이 넓어진다.’는 ‘박학무방(博學無方)’의 정신이다. 목적을 정하지 않아야 위대해진다.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주자의 말처럼, 끝까지 가보겠다는 의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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